영국 장르영화의 명가 해머필름과 일링스튜디오 부활 움직임
전후 영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일링스튜디오와 해머필름이 새 경영자를 맞아 전성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버라이어티>가 보도했다. 일링과 해머는 각각 ‘일링 코미디’와 ‘해머 호러’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장르영화의 명가들. 당대 비평가들에게는 말초적인 오락물이라는 경멸을 받았지만, 산업화에 대항해 전통적 공동체의 가치를 옹호한 일링의 코미디와,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아이콘 캐릭터를 앞세운 해머 필름의 고딕호러는 영국 안팎에서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두 회사가 새삼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근본적 이유는, 일링의 괴짜 코미디와 해머의 B급 호러가 최근의 판타지, 비주류적 코미디의 유행과 상통하기 때문. <버라이어티>는 팀 버튼의 <슬리피 할로우>나 해머의 대표 배우인 크리스토퍼 리의 인기, 코언 형제와 톰 행크스가 일링 영화의 리메이크에 착수한 점을 지적했다.
일링의 부활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은 파라마운트에서 <웨인스 월드> 등의 코미디 제작에 참여했던 프로듀서 바나비 톰슨. 톰슨은 동업자 우리 프루트만과 함께 이끌어온 자신의 영화사 프래자일필름과 일링을 병합해, 촬영소 임대를 주업으로 삼고 있는 일링을 제작사로 부흥시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2002년 일링의 간판 아래 <진심의 중요성>을 제작한 바 있는 톰슨은 미라맥스와 퍼스트 룩 계약(프로젝트에 관해 투자, 배급 우선권을 주는 계약)도 맺었고 TV쇼도 제작하고 있다. 현재 8천만 달러 규모로 개축에 들어간 일링 촬영소에는 <슈렉>의 프로듀서 존 윌리엄스가 작업할 CGI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영국 텔레콤의 모바일 콘텐츠 개발팀이 입주할 예정이다. 한편 일링은 스튜디오 내에서 운영 중인 코미디 클럽을 통해 아이디어와 신예 코미디언을 발굴해 TV와 영화로 가공한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70여편의 클래식호러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데다 컬트팬층이 일링보다 확고한 해머 필름은 라이브러리 자체가 큰 재산이다. 1983년 이후 실질적 제작활동을 중단한 해머필름의 재건은 전직 언론인 테리 일로트와 배급사 퍼스트 인디펜던트 필름에서 일했던 피터 내시가 이끌고 있다. 광고 재벌 찰스 사치, 워너뮤직 영국 지사장 롭 디킨스, 출판사업가 윌리엄 시그하트 등이 이들이 확보한 투자자. 해머는 리메이크와 공포영화 전문 케이블채널과 같은 기본사업부터 신작 영화, 연극, 호러 캐릭터를 이용한 게임, 장난감 사업까지 진출한다는 구상이다.
<버라이어티>는 RKO나 모노그램 같은 옛 스튜디오를 부활시키려는 할리우드의 시도는 좌절했지만, 일링과 해머는 특정 장르에 기반한 선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재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일링과 해머의 새 경영자들은, 투자자와 배우, 감독을 유혹할 수 있는 유서 깊은 브랜드는 출발점일 뿐 성공의 보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대다수 20대 멀티플렉스 관객에게 일링이나 해머는 낯선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규 관객층을 확보하고 멀티미디어 시대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 일링과 해머는 과거 트레이드마크였던 일링 코미디의 영국적 정서나 해머 호러의 야하고 유치한 스타일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다. “최근 10년간 히트한 영국영화의 다수는 넓게 보아 일링 코미디”라는 톰슨의 해석이나 “복고적 이미지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도 성공적이었다. 스타일을 고급화하는 것이 관건이다”라는 일로트의 견해는 일링과 해머의 진로를 짐작게 한다. 김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