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머스 해리스가 있는 뜸 없는 뜸 다 들인 끝에 <양들의 침묵> 속편을
내놓았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티븐 킹 같은 사계의 권위자가 한니발 박사를 “우리 시대 소설이 낳은 가장 위대한 괴물”이라고 치켜세우며
극찬을 했다. 그러니 그 기대감이 오죽하랴만, 돌아온 렉터의 영화를 목빼고 기다려온 분들이여, 그만 고정하시고 눈높이를 낮추시라.
영화판 <한니발>은 괴물이라기보다는 그저 괴이쩍을 뿐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속편으로 따지자면, 바보천치같은 <대부3> 따라갈 영화가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니발>에 구원 따위는 없다. 그저 떼돈 벌 욕심에 눈이 먼
패거리들 외에는. 그리고 돈 버는 일이 꽤나 엄숙한 과업이라도 된다는 듯이, 할리우드 스튜디오 두곳에다 리들리 스콧, 데이비드 마멧, 스티븐
제일리언 같은 몸값 비싼 재주꾼들 여럿, 뿐만 아니라 플로렌스시까지 이 일에 뛰어들어 구색을 맞춰주었다. 비록 열의의 대부분을 영화포스터
찍는 데 탕진하긴 했지만, 앤서니 홉킨스경은 황송하게도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내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다시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그에
반해 FBI 견습요원 클라리스 스탈링 역에 얼마 남지 않은 성인 연기자로서의 생명을 몽땅 쏟아부었던 조디 포스터가 출연을 고사함으로써,
어떤 역이든 마다하는 법이 없는 줄리언 무어에게 어부지리가 돌아갔다.
무어는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쯤 돼서 첫 시련을 겪는데, 이제는 FBI 특공대가 된 클라리스가 워싱턴에서 마약소탕작전을 지휘하다가 삑사리가
나서 ‘와코 작전’ 때와 비슷한 스캔들에 휘말린다는 얘기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전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를 쐈어요”라고 울면서 떠드는
장면은, <양들의 침묵> 행간에 깔려 있는 갖가지 부모자식간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무어는 조디 포스터의 클라리스 스탈링 연기를
상당 부분 벤치마킹하고 있지만, 시종일관 안달복달해대는 그의 연기에서는 포스터가 묘사했던 외롭고 상처받기 쉬운 클라리스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무어가 연기하는 클라리스는 자부심에 찬 독불장군일 뿐이다. 전편에서 그녀를 감싸고 보호해주던 FBI 상사들은 능글맞은 상사 크렌들러(레이
리오타)로 바뀌는데, 이 작자는 뭔지 모를 사악한 이유로, 그녀의 명예에 흠집을 낼 뿐만 아니라 함정에 빠트리기까지 하려 든다.
<양들의 침묵> 때와는 달리 <한니발>에는, 코없는 괴물로 분장한 게리 올드먼이 연기하는 그로테스크한 억만장자 메이슨버거를 빼놓고는, 스탈링이 처치해야 할 마땅한 도깨비가 없다. 버거는 사도마조히즘의 향연을 맛본다는 상호합의 아래 렉터를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흥분제(아밀 아질산염)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리조각으로 얼굴 살점을 베어서 개한테 먹이라는 렉터의 지시를 따랐단다. “그땐
괜찮은 아이디어 같더라구.” 그것도 농담이랍시고 버거가 산소호흡기 사이로 할딱거리며 클라리스한테 들려준 말이다.
버거는 (그 유명한 하키 마스크에 25만달러나 줘가면서) 렉터의 기념품을 수집하는데, 나아가서 렉터 본인까지 수집할 계획을 갖고 있다.
클라리스 또한 악몽 같은 지도자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지가 십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편지를 받기 시작한다. 사람을 먹는 버릇에
관한 한 제 버릇 개 못 준 주제지만, 렉터는 아직도 클라리스 본인보다는 그녀의 심리에 더 매혹돼 있다. 이때 액션의 무대는 바야흐로 이탈리아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역시 렉터는 거만떠는 현지경찰(지안카를로 지아니니)에게 쫓긴다. 이 형사는 고작 깨끗한 지문 하나 얻으려고 기둥투성이
회랑과 곰팡내 나는 도서관들, 광장들로 끝없는 추격전을 벌이는 것이다. 영화가 워싱턴으로 돌아온 뒤에도, 리들리 스콧은 여전히 장중한 합창을
깔고 안개 제조기를 부지런히 돌려대는가 하면, 가능한 한 많은 장면을 쇠창살에 가둬놓으려고 안달이다.
겉멋부리기 좋아하는 스콧의 연출기법은 신화를 창조해내는 데 적합하지만, 홉킨스가 자신이 맡은 악마 같은 배역에 아무리 열의를 보인다 해도그 또한 <글래디에이터>의 디지털 효과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스콧은 그의 얼굴에 기회있을 때마다 (공포분위기 조성용으로)
밑으로부터 조명을 쏘아댄다. 메스를 단 한번 되는 대로 휘둘러서 목을 잘라내는 실력의 렉터는, 클라리스의 독신여성 아파트에 걸어들어가 그녀의
잠든 얼굴을 지켜볼 때처럼 무사태평한 얼굴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다. 의도한 것보다는 덜 냉소적으로 뽑혀나온 <한니발>은 괜히 지멋에 겨워 난리다. 이 영화의 코미디 같은 하이라이트 중에는, 클라리스가
후각 예민한 인간 ‘개코’들을 동원해 냄새로 렉터의 향방을 쫓는 장면이라든지, 렉터가 역 앞 광장에서 부모님에 대한 클라리스의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 계속 휴대폰 통화를 하면서 그녀를 이러저리 끌고다니는 ‘추격전’ 장면 따위가 포함돼 있다. 참, 버거가 오랫동안 스크린을 어지럽혀온,
별 볼일 없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집어삼키라고 식인 돼지떼를 풀어놓는 장면도 있구나.
제작사는 평론가들에게, 이 영화의 쇼킹한 결말을 밝히지 말라고 분부했다. 그러니 이 영화가 R등급을 받지 않았더라면 <인디아나 존스>를
보지 못한 초등학생들이 보고 딱 좋아했을 만한, 구역질나는 요리 장면이 있다는 정도만 밝혀두겠다. (20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