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가 싫다. 특히 싫어하는 새는 닭과 비둘기다. 싫어한다는 것은 너무 거만한 표현이고, 실은 무섭다. 내가 어려부터 지금껏 꿔온 수많은 악몽의 종류는 닭이 등장하는 꿈과 비둘기가 출연하는 꿈, 딱 두 가지다. 뚱뚱하고 더러운 닭이나 비둘기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모가지를 실룩이며 나를 쳐다보거나 뒤뚱뒤뚱 따라오는 꿈을 꾸게 되면 나는 영락없이 비명과 함께 잠을 깬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는 기습적으로 새가 나오거나 새를 클로즈업하는 영화다. 나는 <집시의 시간>은 “갑자기 칠면조가 나오는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갑자기 죽은 메추리가 나오는 영화”, <파니핑크>는 “갑자기 죽은 비둘기가 나오는 영화”, <아름다운 비행>은 “시종일관 새가 나오는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히치코크의 <새>? 그건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새를 무서워하는 건 일종의 정신병 수준이다. 두려워하면서도 기회만 닥치면 끊임없이 새를 생각한다. 저 꿈틀꿈틀하는 목은 실은 길이가 얼마나 될까? 저 무서운 부리는 재질이 뭘까? 저 푸드덕거리는 날개와 징그러운 발은 몸과 어떻게 연결돼 있을까? 도로에 나뒹구는 까만 비닐봉지를 보고 새인 줄 알고 운전하다 사고를 낼 뻔한 적도 있고 낮게 비행하는 비둘기나 까치와 부딪힐까봐 길가다 얼굴을 감싸고 발을 멈춘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전에 비둘기가 많은 동네에 살았을 때는 비둘기가 들어올까봐 더운 여름에도 창문을 단 한번도 열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내 아들이 자라 하교길에 병아리를 사들고 돌아올 날이 올까봐 두렵다.
그런 내가 <치킨 런>을 보러 갔다는 것은 대단한 도박이었다. 아무리 봐도 닭같이 보이지 않는 닭들이 나오니 괜찮다고 지인들이 비록 일러주긴 했지만 나의 ‘새-포비아’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극장 맨 뒷자리를 잡았으며 갑자기 비명을 지르게 될 가능성에 대비해 부끄럼을 피하고자 혼자서 영화관을 찾았다.
그러고 한 시간 반…. 나는 내 상상력에 경악을 했다. 사람들 말대로 그 닭들은 닭이라기보다는 찰흙병에 눈, 코, 입을 붙인 장난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들이 땅에 머리를 박을 때마다 깃털이 듬성듬성한 엉덩이를 보며 진짜 닭을 떠올렸고 닭들이 줄줄이 둥지에 올라 자고 있을 때나 일제히 나와 줄을 맞출 때, 그리고 우르르 달려갈 적에 자꾸 실사 닭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혼자 부르르 떨었다. 저게 진짜 닭들이라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해가며. 정말 한심하리만치 놀라운 상상력이었다. 나는 <치킨 런>을 보며 나의 새-포비아가 얼마나 깊은지를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나니 더욱 징그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다들 알겠지만 애니메이션이란 정지된 그림을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최대 1초 24프레임까지 쪼개서 촬영하는 것이다. “째깍” 하는 1초의 시간을 스물네개로 나눈다는 것은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는 3초 남짓한 장면을 위해서도 70개가 넘는 서로 다른 그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림이 아닌 인형을 움직여 만드는 이런 클레이메이션의 경우,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움직임을 위해 손가락을 핀으로 밀며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찍기를 정말 수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애니메이션 관련 일에 종사했던 나는 일하는 내내 “이 사람들이 과연 제정신일까” 하는 의문을 심각하게 가졌고, 몇몇 애니메이터들은 “우리 실은 미쳤어” 하며 고백해오기도 했었다. 20분짜리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분류하지만 제대로 된 클레이메이션을 20분짜리로 만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티끌을 쌓아 만리장성을 만드는 그런 엄청난 작업인 것이다. 그런데 <치킨 런>은 무려 84분이다. 길이로만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클레이메이션의 경우 속도감을 표현하는 것이 최대 난제다.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그것도 엄청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이 장르의 가장 큰 난관인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곤두박질쳐 내려오는 닭이라든지 기구를 이용해 메다꽂히는 닭들을 표현해낸 솜씨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수십개 세트를 동원해 동시에 촬영했다고 한들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잡아먹은 작업이었겠으며 단 한 과정도 건너뛸 수 없는 머리에 쥐나게 하는 수작업을 얼마나 되풀이했을까, 저만한 작업을 가능케 한 자본과 뒷받침과 숙련도와 정성은 대체 얼마만한 것일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니 머리가 다 아파졌다. 하체가 저렇게 큰 인형을 지탱하려면 다리 재질도 여간 특수한 게 아닐 텐데, 대체 뭐였을까, 발갈퀴를 어떻게 벌려 세우면 저렇게 서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자잘한 궁금증들은 다 풀어볼 새도 없었다. 더불어, 말도 안 되는 예산과 여건으로 한국의 애니메이션과 씨름하던 과거의 지인들이 떠오르며 생각의 회로는 멎어버렸다.
나는 이래저래 <치킨 런>의 그 뛰어나다는 오락성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그 애니메이션쟁이들의 능력과 수고와 철저함은 닭보다 더 징그러웠으며 그런 마조히스트적인 작업을 몇년간 한결같이 지속한 그들의 정신병은 나의 가공할 새-포비아조차도 무릎꿇어야 할 만한 중증이었던 것이다.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shimba@drea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