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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로 돌아온 TV 드라마의 중견배우 4인 [5]

사막을 건너 살인의 현장으로 돌아온 영화청년

<영자의 전성시대>부터 <살인의 추억>까지, 배우 송재호

I’m Back_ 사막의 모래바람을 타고

2000년 7월 송재호(61)씨는 김성수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8월부터 중국에서 촬영할 영화 <무사>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무렵 그는 아직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막내아들이 28살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죽고 한동안은 기억력을 잃어버렸다. 두줄짜리 대사를 외우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해 6월20일부터 세실극장에서 모노드라마를 했는데 그걸 하면서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그 연극이 끝나기 직전 <무사>에 출연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고. 딱 필요한 시점에 다시 영화를 만난 셈이다.” 아들의 죽음과 영화의 부름은 묘하게 엇갈렸다. 아들의 유해를 평소 아들이 수상스키를 즐겨 타던 미사리 근처 한강에 뿌린 그는 양수리 종합촬영소를 가기 위해 팔당대교를 건널 때마다 상념에 잠긴다고 한다. 떠나는 것과 찾아오는 것이 마주친 지점이다.

<무사>에서 고려 사신으로 등장한 그는 젊은 감독, 배우, 스탭과 더불어 한낮의 기온이 40도에 이르는 은천의 사막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데다 노인 분장까지 해놓으니 혹시 촬영하다 쓰러지지 않나, 제작진의 걱정이 상당했지만 송재호씨는 선두에 서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막에서 행군하는 장면을 찍을 때 느닷없이 불어닥친 모래바람을 보고 “저 속에 들어가서 찍자”고 주장한 사람도 그였다. 강풍기 3대를 동원해 3일간 찍기로 예정했던 장면이 그렇게 하루 만에 완벽히 사실적인 화면으로 만들어졌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의 신동철 반장으로 송재호씨를 떠올린 것도 <무사>를 보고나서였다.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익숙하지만 거꾸로 상욕을 서슴지 않는 다혈질인 수사관을 연기하면 흥미롭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냥 서울말로는 못하겠더라. 부산 사투리를 쓰겠다고 했더니 감독도 그게 좋겠다고 했다.” <살인의 추억>에서 젊은 형사들을 휘어잡는 강인한 인상은 송강호와 김상경이 술자리에서 다툴 때 자다가 벌떡 일어나 고함치는 장면에서 특히 빛난다. 3분50초의 롱테이크로 찍은 이 장면은 18번의 NG를 거쳐 탄생했는데 송강호, 김상경의 연기대결도 좋지만 송재호씨의 마무리도 일품이다. “느그, 이노무 새끼들,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싸우고 지랄병 하면 내 손에 죽는 줄 알어. 새끼들아! 알았나!” 뒤이은 출연작 <내사랑 은장도>와 <고독이 몸부림칠 때>가 그에게 경상도 사투리를 요청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Once Upon A Time_ 막차에서 스타가 되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늘 가방 속에 카메라를 넣고 다녔다고 한다. 엿장수의 고물주머니를 뒤져 사진카메라는 물론 나중엔 8mm 영화카메라까지 사서 언젠가 내 영화를 찍겠다고 마음먹었다. 말론 브랜도,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젊은 사자들>을 12번 되풀이해 보던 그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카메라와 영사기를 직접 만들겠다고 도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동아대 국문과에 진학했고 1959년 부산의 방송사에서 성우로 연기세계에 첫발을 디뎠다. 성우로 활동하는 틈틈이 마음맞는 이들을 모아 연극을 했던 송재호씨가 아무 대책없이 서울로 간 것은 1964년.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있었지만 홀로 상경한 그는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무로를 찾았다.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난 감독이 <하녀>로 유명한 김기영 감독. 김기영 감독은 대뜸 “내 영화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라고 물었고 “주인공 눈에 다 쌍꺼풀이 있다”고 스스로 답했다. “그때 오기가 생겼다. 그럼 눈을 찢고 오면 되겠냐고 말하고 그 길로 병원에 가서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까지 했건만 김기영 영화에 출연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는 그해 박종찬 감독의 영화 <학사주점>으로 어렵게 영화에 데뷔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여자들만 사는 거리>

<살인의 추억>

하지만 한두편 출연했다고 스타가 될 수는 없었다. 눈에 번쩍 띄는 외모도 아닌 그에게 춥고 배고픈 무명배우의 설움은 예견된 것이었다. “한번은 양쪽 손에 트렁크 들고 기차표를 입에 물고 부산으로 내려가겠노라 대문을 박차고 나서는데 전화가 왔다. 이만희 감독이 <흑맥>이라는 영화를 찍는데 배우 오디션을 한다는 거였다. 딱 한번만 더, 하는 심정으로 오디션을 봤고 배역을 따냈다.” <흑맥> 이후 이만희 감독의 영화 여러 편에 등장했지만 여전히 스타의 길은 멀고 험했다. 그러다 TV 연기를 시작한 것이 1967년. 86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드라마 <아로운> 주인공 오디션에 합격한 것이다. TV와 영화를 오가며 연기를 계속하던 그는 1975년 <영자의 전성시대>로 처음 흥행배우로 등장한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했는데 당시에 49만5천명이 이 영화를 보고 갔다. 극장에서 골목까지 줄을 선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났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 이렇게 사람이 몰리다니,하며 감격했다.” 하지만 그가 스타가 된 시점은 한국영화가 이미 몰락의 조짐을 확연히 드러내던 때였고 <겨울여자> <꼬방동네 사람들> 등 몇편의 영화를 지나면서 송재호씨는 영화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기가 오기 전까지 그는 TV를 주무대로 삼아 활동했고 1978년부터는 취미로 시작한 사격에 열정을 쏟았다. 5년간 전국체전에서 서울대표 사격선수로 활동했던 송재호씨는 그뒤 환경보호를 위해 밀렵감시단을 만들어 운영하는 활동도 했다.

The Show Must Go On_ 7대의 카메라, 못다핀 꿈

“영화를 찍을 때가 가장 즐겁다. 스탭과 함께 움직이는 동안 내 삶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송재호씨는 여전히 영화를 꿈꾸는 소년의 눈망울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고물상을 뒤져 8mm 카메라만 7대를 수집했고 영화 팸플릿만 수천장을 모았다. 며칠 전 자신이 출연한 영화 <사랑의 조건>을 케이블TV에서 방영한다기에 새벽 3시까지 기다려서 봤다며 수많은 출연작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걸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5편 정도 썼고 영화사를 만들어 직접 제작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기회가 닿으면 정말 만들고 싶다.” 청년 시절 못다 핀 영화배우의 꿈을 다시 펼친 이 노년의 배우가 보여주는 열정은 정말이지 젊은 배우들이 못 쫓아갈 종류임이 분명하다.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필 모 그 라 피 (Filmopraphy)

1942년생.

영화 <학사주점>(1964) <영자의 전성시대>(1975) <겨울여자>(1977) <꼬방동네 사람들>(1982) <용병이반>(1997) <무사>(2001) <몽중인>(2002) <이중간첩>(2003) <살인의 추억>(2003)

TV <태양은 가득히> <명성황후> <장희빈><상도> <선물>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천사의 분노> <용서> <메디컬센터> <엄마의 노래>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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