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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3]

한지승

/ 영화감독

유영길 감독님이 카메라 뷰파인더 보여줬을 때

유영길 촬영감독님을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라는 영화에서 만났다. 조감독으로서 선망의 마음을 품고 있던 나는 촬영현장에서 유 감독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지. 하지만 평소 농담 같은 건 일절 기대할 수 없는 무뚝뚝함과 차돌 같은 작은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가 만들어내는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는, 비록 데뷔를 눈앞에 둔 조감독이라고는 하지만 식당에서 가끔 겸상을 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촬영현장이 늘 그렇듯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잘 보이기는커녕 거듭되는 실수에 유 감독님의 직격탄도 몇번 맞았고, 이러다가는 감독돼서도 유 감독님과는 일 절대 못한다 싶어 몸사리고 일할 즈음 그분께서 주신 선물 하나가 기억이 난다. 어느 현장에서, 트라이 포트에 세워진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지나가던 촬영부 서드가 멋모르고 들여다봤다가 모모 촬영감독에게 개맞듯 맞고 쫓겨났다는 전설이 면면히 흐르던 시절, 마음 약한 신인감독은 관록있는 촬영감독에게 카메라 뷰파인더 좀 보자고 말 한번 꺼내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이른바 루빼라고 불렀던 촬영 고유의 성역 같던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촬영 막바지인 어느 날 유 감독님이 저를 부르시곤 ‘조 감독, 이거 보고 소품 배치해라…’하시면서 보여주셨다. 순간 귀가 멍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참 술을 많이 마셨다. 분명 유 감독님이 나의 무언가를 인정하신거다라는 조금은 무리한 상상을 하며 마냥 기뻐했다. 지치고 피곤했던 조감독 시절, 어쩌면 그때는 그런 힘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오해로 비롯된 해프닝일지라도 어떻게든 잘해내겠다는 나의 의지 안에는 존경하는 유영길 촬영감독님이 계셨던 것을 기억한다.

김정은

/ 영화배우

라디오에서 내가 부른 노래 들었을 때

<가문의 영광>을 촬영하면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노래’였다. 감독님께 부탁해 이 장면의 촬영을 맨 뒤로 연기해뒀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나리오상에서 나는 <백만송이 장미>를 부르게 돼 있었다. 그런데 내키지 않았다. 어릴 때 좋아했던 <나 항상 그대를>을 부르고 싶었는데, 우기고 나설 용기가 없었다. 우연히 감독님이랑 사장님께 “부르고 싶은 노래가 따로 있다”고 말했는데, 의외로 선뜻 “그럼 해보라”고 독려해주셨다. <나 항상 그대를>을 부르기로 하면서, 예기치 않은 해답도 나왔다. 원래 시나리오상에서 노래와 상황은 별개였는데, 이 노래말은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군더더기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화하고 교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같이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 절감했다. 그리고 몇달 뒤. 이동 중인 차 안에서 내가 부른 <나 항상 그대를>이 흘렀다. 좀 지겨워져서 “그만 좀 듣자”고 했을 때 매니저가 답하길, “이거 라디오인데”라는 거다. 내 생애 이런 기적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나와 관객의 주파수가 딱 맞았다니! 잊을 수 없는 짜릿한 체험이었다.

장혁

/ 영화배우

5m 깊이 풀에 빠져 숨 못쉬고 기절했을때

<화산고>의 보충촬영 때, 5m 깊이의 풀에 빠지는 상황을 찍을 때였다. 카메라가 부감으로 수중촬영을 하고 내가 3m 깊이에 이르렀을 때, 대기해 있던 다이버가 날 잡아주기로 했다. 그런데 다이버에게 어떤 착오가 생겼는지 난 그만 5m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문제는 수압이었다.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고, 고막에선 펑펑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의 공포감이라니. 뒤늦게 달려온 다이버가 구출용 산소마스크를 들이댔다. 단추를 누르면 입 안에 찬 물을 뽑아내고 숨쉴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한데 워낙 긴박한 상황에 당황해서인지 입으로 숨을 쉬어야 할 것을 코로 호흡을 하고 말았다. 그 결과 물을 잔뜩 먹고 무려 30∼40분 동안이나 기절해 있어야 했다. 나의 기절 행진은 여섯번인가 일곱번에 이른다. 지금은 와이어를 기계로 안전하게 움직이지만 그때만 해도 온갖 스탭이 매달려 와이어를 당기고 놓고 했다. 한번은 물통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그걸 터뜨릴 때 와이어를 타고 그 주위를 타고 돌아가는 장면을 찍었다. 그런데 실수로 계산을 잘못해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쪽으로 몸이 다가가고 말았다. 코앞에서 터지는 폭파장면이 어찌나 실감나던지. 비록 기절 행진을 하긴 했지만 줄 잡느라 엄청 고생했던 음향, 조명 등의 스탭들과 술로 날마다 회포를 풀며 정말로 친해져버렸다.

유인택

/ 기획시대 대표

석고 붕대 안 감고 분신장면 찍었을 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빠듯한 제작비로 어렵게 찍은 영화였다. 하지만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분신하는 장면만은 대충 찍을 수 없었다. 그때는 할리우드에서도 사람의 몸에 불이 붙는 장면을 찍으려면 석고 붕대를 칭칭 감고 멀리서 촬영을 하곤 했다. 만약 전태일이 그렇게 붕대를 감고 뚱뚱해진 몸으로 분신을 한다면 영화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났겠는가. 전혀 진실해 보이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 하나,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공부했던 허창경 프로듀서(<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프로듀서)가 호주에 특별한 기술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피터 그레이를 만났다. 그레이는 처음 한국에 오자마자 긴팔 티셔츠에 바지만 입고선 특수약품을 뿌리고 불붙이는 장면을 보여줬다. 짜릿했다. 문제는 호주 스탭이라 인건비가 비쌌다는 것. 호주 스탭들은 작품당 계약을 하지 않고 일당을 받았기 때문에 딱 5일 만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 그래서… 정작 홍경인이 분신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엔 피터 그레이는 한국을 떠나고 없었다. 홍경인은 엄청나게 불안해했다. 스턴트맨이 호주에서만 나는 어떤 식물로 만든 약품을 받아놨고, 기술도 좀 배웠지만, 당사자가 없었으니까. 다행히 촬영은 무사히 끝났고, 분신장면은 포스터에도 썼다.

이춘연

/ 영화인회의 이사장

<영웅연가>에서 헬리곱터 잠자리만하게라도 찍혔을 때

김유진 감독과 의기투합해 대진영화사를 차렸던 1985년. 창립작 <영웅연가>를 촬영 중이었다. 특히 신혼여행 중인 길용우와 송옥숙의 경호를 위해 헬리콥터가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진땀을 뺐다. 김 감독과 신옥현 촬영감독, 그리고 배우들은 10시에 출발하는 부산행 새마을호 탑승을 위해 서울역에, 서정민 촬영감독은 헬리콥터에 오르기 위해 오산비행장에, 그리고 헬기가 기차에 접근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홍재균 제작실장은 평택으로 찢어져 있었다. 작전은 평택 부근에서 헬기가 기차를 따라잡아 저공 비행을 시도하면 평지와 기차 안에서 이 광경을 카메라로 순간 포착하는 것.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눈에 보이면 재빨리 카메라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재촬영할 여력 또한 없었으니 주어진 기회는 단 한번뿐이었다. 드디어 작전 개시. 3대의 카메라가 평택에서 도킹을 시도했고, 얼핏 성공한 듯 보였다. 기차는 부산을 향해, 헬기는 대전을 향해 날아간 것을 확인하고서 한숨을 내쉰 난 돌연, 카메라를 잡았던 홍 실장의 한마디에 억장이 무너졌다. “나타나자마자 휙 지나가버리네….” 나야 그렇다치더라도 비보를 전해 들은 김 감독은 데뷔 준비라곤 영화 촬영현장을 2시간 ‘견학’한 것이 전부였으니 현상 때까지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다행히 잠자리만한 크기의 헬기가 카메라에 포획됐음이 확인됐고, 그때의 해프닝은 이제 현장 외줄 인생 20년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박중훈

/ 영화배우

신현준·김승우 <황산벌> 까메오 자청했을 때

영화 만드는 인생은 만남과 이산의 반복이다.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일정기간 동안 밤낮으로 뒤엉켜 한꿈을 꾸다가 영화가 완성되면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를 시작한 지 오래된 내겐 언젠가부터 함께 일하는 사람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같이 일하는 동료가 됐다. 하지만 영화배우란 통합되기 힘들다. 각자 개성도 강한데다가 언론과 관객, 영화 관계자들도 은근히 우리의 경쟁을 즐긴다. 그러다보니 괜한 미움과 질투도 떠돈다. 배우 생활을 하다보니 그것이 허망함을 깨달았다. 선의의 경쟁은 당연하지만 최고의 친구도 서로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안성기 선배와 내가 선후배이면서 속으로는 가까운 친구이듯이. 영화를 주로 하는 형편이 비슷한 남자배우들은 한국에서 고작 20명인데 이 얼마나 희소한 직업군인가. 나중에 후배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다가서기로 결심했고 장동건, 신현준, 김승우씨 같은 후배들과 자주 어울렸다. <황산벌>은 내가 충무로 현장으로 참 오랜만에 돌아온 조심스런 작품이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황산벌> 이야기를 꺼냈더니 내가 수염 달고 상투 튼 모습이 장관이겠다며 허리가 끊어져라 웃던 김승우, 신현준씨가 불쑥 “우리도 한번 출연해야겠다”고 제안했다. 단역 출연을 자청하는 일은 별것 아닌 듯싶지만, 자신의 가치에 민감한 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결심이다. 결국 두 사람은 경상도 말을 연습해 신라군에 잠입하는 백제군 첩자를 연기했다. 신현준씨는 부산에서 <페이스>를 촬영하고 김승우씨는 <역전에 산다> 개봉 홍보로 바쁠 때였다.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다시 관객과 가까워지는 일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두 사람이 출연을 자청했을 때, 실제로 부여까지 내려와 지저분한 시대극 분장을 하고 촬영장에 섰을 때, 그리고 밤샘 촬영을 마치고 분장을 지운 얼굴로 핸들을 잡고 서울로 촬영지로 떠나가는 뒷모습에 세번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선아

/ 영화배우

파편 튀어 볼살 떨어졌는데 스탭들이 병원 데려 갈 때

부산의 한 폐공장에서 <예스터데이>를 찍을 때였다. 현장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부하들을 이끌고 총을 쏘면서 뛰어가는 촬영에 들어갔다. 리허설했던 대로 동선 그대로 뛰어갔다. 폭파가 있었다. 생각보다 파편이 많이 튄다 싶었다. 유리창이 부서져 온몸이 다 꽂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옷을 많이 껴입어서 다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물론 온몸이 아팠다. 다들 모니터 앞으로 몰려들어, 물론 나도, 촬영된 걸 보면서 ‘와, 잘 찍었다’고 박수치고 있는데 누군가 날보고 피가 난다고 했다. 왼쪽 볼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아찔했다. 몸이 상해서가 아니라 얼굴은 감출 수도 없는데 이러면 앞뒤 장면이 튀지 않겠는가. 그날은 마침 매니저가 현장에 없었다. 다쳤다고 확인되는 순간 놀란 제작부가 급히 병원으로 후송해주었다. 그뒤 일주일간 촬영을 미뤄주고 정성껏 보살펴주는 배려가 베풀어졌다. 밀양의 사자평이란 산꼭대기에서도 그랬다. 2월이어서 무지 추웠는데 촬영공간이 앞뒤로 펑 뚫려 맞바람이 거셌다. 그런데 제작부가 춥다며 비닐로 그 바람을 다 막아줬다. 자기네는 그 바람을 다 맞아가면서. 그곳은 올라가는 데 차로 30∼40분씩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지프 아니면 올라가기가 힘든 곳인데 지프는 두대밖에 없었다. 배우들이 우선이라는 스탭들의 생각 아래 우리는 그냥 편히 그 차로 올라가고 스탭들은 용달에 열댓명이 올라타서 올라오곤 했다. 지금까지도 제작부를 비롯한 그때의 스탭들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 나를 나보다 더 아껴준 그들, 너무나 고마웠다. 이건 절대로 빈말이 아니다.

곽재용

/ 영화감독

발전차 고장났는데 이동 중인 발전차 소식 들려왔을 때

2002년 9월11일, <클래식> 촬영 3일차 되는 날. 서대전의 반딧불 냇가의 다리장면. 이어 안동으로 이동. 미루나무숲이 남아 있는 하아리에서 쇠똥구리 장면과 준하가 주희를 업고 공갈 안 공갈하며 둑길을 걷는 장면을 찍고나니 벌써 저녁 8시! 다음 촬영은 하회마을. 40분 정도 거리를 이동해서 주희가 몽유병에 걸려 집 앞을 거니는 장면과 준하가 굿을 구경하기 위해 담장을 넘는 장면을 위해 밤샐 각오를 다진다.

미술팀은 낮부터 작업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스탭들이 식사를 하고 하회마을에 도착하자 이미 밤 10시. 조명부가 선을 깔고 카메라가 준비된 시간이 12시. 겨우 리허설을 하려고 하는데…. 이런! 18kg짜리 대형 HMI 라이트가 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원인을 알아봐도 발전차 고장이란 것 외엔 알 수 없고, 시간은 자꾸 가고…. 애태우는 동안 나는 철수를 할 것인지 발전차가 수리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결정을 해야만 했다. 촬영을 개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빵꾸(늘 쓰던 대로^^)가 나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나 있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이번 촬영취소가 나쁜 소문으로 돌변할지도 모르고 스탭들의 사기에도 좋을 리 없다. 하루를 더 있게 되면 제작비 추가는 물론, 애써 깔아놓은 흙이며 담쟁이, 소품들, 엑스트라들, 모두 헛고생이다. 철수하면 하회마을에 또 올 수나 있을까? 촬영에 전혀 협조가 안 되는 마을인데….

그리고 새벽 1시.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내게 믿지 못할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현재 부산으로 이동 중인 발전차가 있다는 것! 하회마을에 도착하는 시간이 2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4시. 두 시간 만에 촬영을 끝낼 수만 있다면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두 시간 만에 끝낼 것을 약속했고, 2시30분이 돼서야 촬영을 할 수 있었다. 4시까지 정신없이 촬영을 끝내고 나자 발전차는 달아나듯 떠나버린다. 떠나는 발전차를 보며 나는 ‘이건 정말 우연 중의 우연이야! 아니, 필연인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치 클래식 대사처럼….

김형구

/ 촬영감독

<투게더>의 바이올린 켜는 아들 모습 찍을때

내 영화경력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첸카이거 감독과 함께한 <투게더> 작업일 것이다. 처음 그의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영광스러웠다.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 <황토지>는 나의 꿈이었고, 첸카이거는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작업은 즐거웠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던 때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아들이 베이징역에서 아버지를 만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아들이 연주한 곡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중 하나이기도 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다. 영화의 감정이 극대화되는 장면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음악이기도 해서 유난히 신경을 썼다. 내 느낌은 내가 아들이 돼서 바이올린을 켜며, 아니 카메라를 켜며 촬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팔을 놀리는 리듬에 맞춰 카메라를 움직인다는 느낌으로. 크게 움직일 수도 없고, 고정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희한하게도 활을 잡은 아들의 손과 내 카메라가 미세한 움직임을 함께하는 듯했다.

최근 DVD로 이 장면을 다시 봤는데, 그 움직임은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더라. 그리고 그 장면을 찍을 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아들과 아버지의 재회라는 영화 속 격앙된 감정, 추앙하는 감독에 대한 경의, 한때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음악에 대한 향수 같은 게 뒤섞인 것 같더라. 아무튼 그 장면이 내게 불가해한 것만큼은 틀림없다.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1]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2]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