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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극장의 추억’을 담은 부천영화제
2003-07-04

영화는 많지만 영화세상은 좁다. 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10일)을 앞두고 김홍준 집행위원장은 최근 한국영사기사협회로부터 영화제에서 일해줄 영사 기사 몇명을 소개받았다. 그 가운데 안치수 기사가 있었다. 홍콩 무협영화에 빠져 수시로 금성극장을 드나들던 중학교 시절에, 거기서 영화를 틀던 사람이 안 기사였음을 알게 됐다. 중고등학교 시절, 단속을 피해 숨다시피 극장을 찾아들어가 보던 그 영화들은 누구에게나 바깥 세상으로 향해 있는 많지 않은 창 가운데 하나였을 터. 다만 연령별로 장철 세대, 이소룡 세대, 성룡 세대, 주윤발 세대로 나뉠 뿐이다. 마침 올해 행사에는 김 위원장이 속한 장철 세대의 홍콩 무협영화들을 가져와 상영한다. 1일 한겨레신문사에서 김 위원장과 안 기사가 만났다.

'쇼 브라더스 회고전' 마련 김홍준 위원장과 영사기사 안치수씨의 '그때 그 시절'

김: (존칭생략)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 중학교가 평준화됐다. 추첨 결과 상도동 사는 내가 한남동의 단국중학교로 가게 됐다. 버스를 남영동에서 갈아탔고, 바로 거기에 금성극장이 있었다. 하교길, 시험 끝난 날, 더러는 시험기간 중, 토요일 오후 등등에 수시로 갔다. 영화 제일 많이 볼 때였다. 인상 깊었던 게 금성극장은 단속이 나오면 학생들은 피하라고 벨을 울려줬던 것 같다.

안: 교육청 같은 데서 단속 나오면 우선 사무실로 데려가 음료수 주면서 시간을 끈다. 그리곤 극장 안으로 안내원들 들여보내서 학생들은 피하도록 했다. 옥상의 간판 그리는 미술실로 가도록 하기도 했고, 정 급할 땐 영사실에 숨겨주기도 했다.

김: 그때 영사실에 숨었던 중학생의 한 명이 나다. 숨기 위해 영사실 문을 열었더니 조그만 눈망울들이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광경이 기억난다.

안: 그때는 홍콩영화가 한창 유행이었다.

김: 그 영화들을 내가 다 봤다. 우선은 액션이 주는 재미가 있었고, 두번째는 비장미였다. 이리 치고 저리 치이던 중학생이 영화 속에서 감정을 푸는 거였다. 왕우, 강대위는 쿨하고, 사랑 고백 같은 건 절대 안 하고, 그러면서 그 여잘 위해서 죽고. 영화를 보면 금방 자신이 왕우가 되고 강대위가 되는 거였다. <대협객>은 두세번 봤다. 왜냐면 유방 노출 신이 들어있었다. 심의 때 잘랐을 텐데 그런 장면이 다시 붙어 상영되는 경우가 재개봉관에서 더러 있었다. 그러니까 재개봉관이 매력이 여러모로 많은 거다. 싸고, 중학생도 들여보내 주고, 아무 데나 앉을 수 있고, 잘린 부분도 살려서 보여주고…. 그런데 한급 더 내려가 삼개봉관으로 가면 화질도 나쁘고, 동시상영이 되니까 시간 줄이려고 자르고.

안: 홍콩영화들은 특히 필름이 약하다. 그래서 재개봉관까지는 괜찮지만 더 내려가면 너덜너덜해진다. 그때 금성극장은 시설이나 내장이 1급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다 짓고 기자재도 설치했다. 최신식 후지 영사기에, 극장 안 천장은 일본 피카디리 극장을 따라서 물결치는 모양새로 지었다. 영화 한편이 필름 5권으로 들어오면, 그걸 서대문의 화양극장하고 같이 틀었다. 한권당 한명씩 붙어서 한쪽 상영이 끝나면 자전거 타고 실어나르는 거다. 그런 일도 있었다. 한명이 교통사고가 났다. 택시를 세워서 ‘이 필름 금성극장에 가져다 주라’고 부탁해 놓고는 병원에 실려갔다.

△ 김홍준 위원장(왼쪽), 영사기사 안치수 씨

김: 그때의 영사 기사 일을 지금과 비교하면 어떤가.

안: 영사 기사 일 배울 때 영사실장이 정신봉이라는 은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내가 졸면 머리를 세게 때린다. 그렇게 배웠다. 실제로 기사가 졸면 불나서 필름이 다 타버릴 수 있다. 군기도 셌다. 선배 양말 내복 빨아주고. 그땐 카본을 태워서 그 빛을 필름에 투사해 스크린에 쐈다. 이게 덜 타면 화면이 푸르스름해지고, 확 붙으면 화면이 빨개진다. 그때 금성극장은 화면이 아주 좋았을 거다. 왜냐면 신품이 들어와서 카본 태울 때 모터로 자동조절이 가능했다. 지금은 전구로 빛을 쏘고, 중간에 필름 안 갈아끼워도 되고, 불 날 일도 없고. 옛날보다 많이 편하다. 그래도 카본 태울 때의 영사 기사가 진짜 기사다.

김: 영화제 때는 다르지 않나. 시간마다 영화가 바뀌니까 필름 종류에 따라 영사기 세팅을 달리 해야 하고. 옛날처럼 필름도 중간에 바꿔줘야 할 거고.

안: 신경 쓸 게 훨씬 많다. 지난 4월 전주영화제 때 한 필름이 장력이 약해서 영사기와 맞지가 않았다. 젊은 기사가 도저히 못 틀겠다고 해서, 내 또래의 기사 한명이 갔다. 손으로 영사기 장력을 조절해 가면서 사고 없이 틀었다. 역시 옛날 기사들이 기사다.

△서울 남영동 금성극장 63년 1월29일 개관, 92년 3월1일 폐관. 한때 개봉관이었다가 60년대 후반부터 재개봉관으로 운영됨. 선린중·고, 용산중·고 등 인근에 유달리 많았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주관객층. 이로 인해 할리우드, 한국영화보다 홍콩영화를 자주 상영. 뒤에 운영권이 금강제화로 넘어갔다가 폐관 뒤 금강제화 창고로 쓰임.

△<방랑의 결투> 홍콩 호금전 감독의 첫번째 무협영화. 66년작으로 원제는 <대취협>. 67년 한국에 수입 상영. 한국에 처음 선보인 홍콩 무협영화로, 왕우 주연의 무협사극 <외팔이> 시리즈와 강대위의 주먹활극 <복수> 등 장철 감독의 무협영화가 70년대초까지 잇달아 수입 개봉.

△김홍준 57년생. 68년 중학교 1학년 때 금성극장에서 <방랑의 결투>를 시작으로, 장철의 <대협객> <돌아온 외팔이> 등 홍콩 무협영화 관람. 후에 영화감독을 거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된 뒤 올해 영화제에 장철, 호금전의 무협영화를 묶은 ‘홍콩영화의 전성시대: 쇼 브라더스 회고전’ 부문을 마련해 <방랑의 결투>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복수> 등 6편을 상영.

△안치수 42년생. 고3 때인 61년부터 미아리 미도극장에서 영사 기사 일을 시작. 파고다 극장 거쳐 65년부터 72년까지 금성극장 영사 기사. 이후 명보극장 등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영사 기사 일을 하다가 92년 귀국. 현재 도봉산 자동차극장에서 일함.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부천시청 강당의 상영작들을 틀 예정.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