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 매딘 특별전-판타지의 새 흐름을 맞이하라
무성영화에 담긴 비틀어진 상상력
로베르토 비네, 장 콕토, 무르나우, 루이스 브뉘엘, 피터 그리너웨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데이비드 린치. 모두 이 한 사람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따라붙는 이름들이다. ‘가이 매딘.’ 국내에는 생소한 감독이지만, 이미 80년대부터 수십편의 장·단편을 만들었으며, 각종 영화제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그의 추종자들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대 판타지 양식의 새 흐름을 제시하는 캐나다 감독 가이 매딘은 줄곧 자신의 출생지 위니펙에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의 영화들은 내러티브를 요약하기 힘들 만큼 시각적이며, 시대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무성영화적이다. 5편의 장편, 4편의 단편, 그리고 그에 관한 1편의 다큐멘터리가 이번 특별전에 상영된다. 기괴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보여주는 가이 매딘식 그로테스크 판타지의 정수를 소개한다.
The Tale from the Gimli Hospital
1988년/ 72분/ 16mm/ 흑백
2만5천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든 가이 매딘의 첫 번째 장편 데뷔작. 위니펙 호수 근방의 김리 병원. 간호사 엠마는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두 남매에게 우화 한편을 들려준다. 전염병에 걸려 김리 병원을 찾은 어부 ‘에나’와 같은 병실의 환자 ‘군나’사이에 벌어지는 애증과 몽환의 이야기. 하지만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 가이매딘은 최소한의 세트, 렌즈의 왜곡, 일부러 거칠게 한 사운드를 이용해 이 영화의 몽환성을 심화한다(일부러 거칠게 만든 사운드는 ‘아마추어의 습작’이라는 오명을 받으며 토론토영화제에서 거부되는 헤프닝을 빚기도 했다). <신비의 도시 아키엔젤> <조심>에도 등장하는 카일 매컬럭이 주인공 에나 역으로 등장한다. 가이 매딘의 영화적 스타일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작.
Archangel
1991년/ 83분/ DVD/ 흑백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신비의 도시 아키엔젤> <황혼의 얼음요정> DVD컬렉션 소개에 이렇게 썼다. “가이 매딘의 영화를 보지 않고는 진정으로 낯선 영화를 봤다고 말할 수 없다.” 때는 제1차대전 직후의 러시아. 존 보울 중위는 전쟁에서 한쪽 다리와 사랑하는 아내 아이리스를 잃었지만, 어느 러시아 마을에서 아내와 닮은 베로니카라는 여인을 만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베로니카의 남편과 존 보울 중위, 그가 머무는 하숙집 식구들의 기괴함, 베로니카에 관한 기이한 열정. 이 복잡한 관계들이 러시아 무성영화 스타일에 담긴다. 인물들의 대사는 모두 의도적으로 후시녹음되어 이질감을 발휘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격찬을 확인할 수 있는 가이 매딘의 두 번째 장편영화.
<조심>
Careful
1992년/ 100분/ 35mm/ 컬러
<조심>은 언제 산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한 산악지대, 톨츠바드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스와 요한. 그들 사이의 여인 클라라의 이상한 관계가 중심이다. 그리고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애정을 느끼고, 요한은 클라라를 사랑하고, 클라라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근친상간의 욕망과 금기의 소재를 특유의 인공세트 안에서 펼쳐낸 가이 매딘식 신화학 또는 기이한 유머. 인물들의 대화 스타일은 허먼 멜빌의 <피에르: 또는 모호함>에 기대고 있다고 한다. <조심>은 그의 첫 번째 장편 컬러영화이며, 신마다 원색의 컬러들이 화면을 뒤덮는 이후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드라큘라의 춤>
Pages from a Virgin’s Diary
2003년/ 75분/ 35mm/ 흑백, 컬러
소설과 발레가 무성영화 스타일에 담기는 아름다운 경험. 가이 매딘만의 독창적인 드라큘라 원전 해석. 가이 매딘은 브람 스토커의 원작소설을 영화의 중심으로 삼지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발레를 끌어온다. 위니펙 발레단이 보여주는 안무에 의해 드라큘라는 재해석된다. 또한 드라큘라 백작 역에는 중국계 배우 장웨이치앙이 맡고 있다. 마치 한편의 발레를 보는 듯한, 그러나 또한 무성영화를 본 듯도 한, 역대 드라큘라를 소재로 한 영화 중 가장 이채로운 작품 중 한편이다.
후카사쿠 긴지 특별전 - 일본 영화산업의 선봉장을 추모하며
야차와 보살, 인간의 두 얼굴을 그린 거장
유작이 된 <배틀 로얄2>를 남겨놓고 올해 초 타계한 후카사쿠 긴지는 일본 영화산업을 선두에서 이끌어온 거장이다. 후카사쿠 긴지는 1961년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단 한번도 일선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상업영화’ 안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고 발전시켜왔다. 후카사쿠 긴지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은 도에이 야쿠자물의 변주인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였고, 80년대에는 시대물 <야규일족의 음모>, SF <우주로부터의 메시지> <부활의 날>, 판타지물 <마계전생> <팔견전> 등 대형 장르영화들을 양산했다. 범작도 꽤 있지만,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는 대체로 흥행과 비평 모두를 만족시켜왔다.
후카사쿠 긴지의 작품세계는 폭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젊은이의 격렬한 청춘을 전후사와 연결지어 그려내면서 완성됐다. 62년작 <명예로운 도전>에서 시작된 사회파 액션은 <의리없는 전쟁>에서 완성됐고, 유작인 <배틀 로얄2>까지 이어진다. 역동적인 핸드헬드 카메라와 극단적인 앵글을 활용한 박력넘치는 영상, 정지화면과 문자의 사용 등이 네오 리얼리즘과 누벨바그에서 영향받은 후카사쿠 긴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올해 부천영화제에 소개된 작품은 4개에 불과하다. 60편이 넘는 후카사쿠 긴지의 필모그래피를 단 4편으로 감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주로부터의 메시지>와 <부활의 날>은 블록버스터 열풍이 한창이던 시기에 만들어진 일본의 대작영화들로, 후카사쿠의 원숙한 연출보다는 특수효과와 스펙터클에 의존했던 영화다. 반면 <의리없는 전쟁>과 <오모짜>는 후카사구 긴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의심의 여지없는 명작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후카사쿠 긴지가 상업영화판 안에서 뚝심있게 걸어왔던 과정이 4편의 영화에 어슴푸레 담겨 있다.김봉석/ 영화평론가
의리없는 전쟁
Battle without Honor and Humanity
1973년/ 99분/ 35mm/ 컬러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세계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걸작. 패전 직후 히로시마의 암흑가는 야마모리조와 토이조 등이 각축을 벌인다.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갔던 야마모리조의 히로노가 돌아온 뒤, 일본 야쿠자 항쟁 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는 히로시마 항쟁이 시작된다. 항쟁의 와중에서 히로노는 토이조의 조장을 죽이고 다시 감옥으로 간다. 이후 야쿠자 세계는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열악한 세트와 조연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등 <의리없는 전쟁>의 제작환경은 대단히 열악했다. 하지만 후카사쿠 긴지는 하락세였던 야쿠자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의리없는 전쟁>에 등장하는 야쿠자들은 밤의 영웅이 아니다. 그릇된 전쟁에 끌려갔다 돌아온 그들은 어떤 대의도 믿지 않고, 자신의 목숨과 눈앞의 승리만을 위해 비열하게 진흙탕에서 싸움을 거듭한다. 후카사쿠 긴지가 다큐멘터리 터치로 그려낸 비정한 야쿠자 세계는, 관객의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홍콩 누아르에 열광한 적이 있다면, 더욱 의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
우주에서의 메시지
Message from Space
1978년/ 105분/ 35mm/ 컬러
가바나스인의 침공을 받은 지루시아인은 그들을 해방시켜줄 용사를 찾기 위해 장로의 손녀인 에테라리다를 우주로 보낸다. 리아베의 과실을 받은 ‘선택된’ 8인의 용사가 지루시아로 향하지만, 지루시아 행성은 이미 거대한 우주 요새로 변해 있다. 당시 대성공을 거두었던 <스타워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대작 SF영화. X윙을 닮은 비행기, R2D2를 닮은 로봇, 데스 스타와 흡사한 행성 병기, 광선검 대신 광선 채찍 등 <스타워즈>의 모방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스타워즈>와 함께 ,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선택받은 용사’ 등 다양한 것들이 뒤섞여 있다. 80년대 잠시 인기를 끌었던 일본풍의 SF, 판타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지금 보기에는 어색하고 촌스럽지만, 당시 기술로서는 비교적 잘 만들어진 일본풍의 대작 오락영화.
오모짜
Geisha House
1999년/ 103분/ 35mm/ 컬러
매춘방지법이 발효된 1958년 교토의 유흥가. 토키코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기생집에서 일하게 된다. 토키코의 꿈은 하루빨리 마이코(어린 게이샤)가 되어 가난한 가족을 돕는 것이다. 주인인 사토에는 페이트론인 요시카와의 도움을 받으며 테루초와 소메마루 등 3명의 게이샤를 데리고 영업을 한다. 다종다양한 남자들이 사토에의 게이샤들에게 지분거리고, 추한 모습을 보인다. 비굴한 요시카와와 관계를 끊은 사토에에게 남은 과제는 토키코를 마이코로 만들어주는 것뿐이다.
<오모짜>의 게이샤들은 평소에는 서로 싸우지만, 남성들이 공격을 할 때는 확실하게 하나로 뭉친다. 그녀들은 강하고, 현명하고 연대감이 있다. 그녀들은 게이샤 이전에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택한 길을, 당당하게 걸어간다. 마이코가 된 첫날, 첫 남자의 품에 안기기 위해 누운 토키코는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남자는 왜 웃냐고 물어본다. 토키코의 답이 무엇이든, 그 남자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살의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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