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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지만 후반부의 빈틈을 채우지 못한 <장화, 홍련>

정서적 클라이맥스가 없다

<장화, 홍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영화와 원작의 관계부터 따지고 넘어가자. <장화, 홍련>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처럼 원작의 핵심은 남겨놓고 무대만 현대로 옮긴 작품일까? 그건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에버 애프터>나 <스노우 화이트>(Snow White: A Tale of Terror)처럼 정치적 공정성이나 현대 호러영화 장르의 필터를 통해 고전을 다시 재해석한 것일까? 미안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장화, 홍련>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원작인 <장화홍련전>을 새로 해석해야 할 텍스트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엄마와 주인공 두 자매의 갈등이 현대화되고 조금 더 복잡해지지는 했지만 그 자체는 영화의 의도가 아니다. 영화가 카피 문구로 내세운 ‘가족 괴담’이라는 표현도 그렇게까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다루는 건 가족간의 갈등이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한 여성의 마인드 플레이이기 때문이다.

만약 <장화, 홍련>이 원작을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이야기는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새엄마가 들어온 집안에서 이런이런 일들이 일어났고 그 때문에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대.”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런이런 일들’이고 끔찍한 비극은 그 ‘이런이런 일들’의 결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이런 일들’ 대부분을 무시해버린다. 영화가 정말로 중요시하는 건 그 끔찍한 비극과 이후의 일들이다. ‘이런이런 일들’은 영화가 진짜로 다루는 그뒤의 비극을 진행시키기 위해 달아놓은 부스터 이상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눈속임인 셈이다. 영화 <장화, 홍련>에서 ‘원작’ <장화홍련전>은 관객을 기만하기 위해 마술사가 흔들어대는 손수건에 가깝다. 진짜 주제를 담은 드라마와 액션은 전혀 다른 곳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어느 미친 정신의 환상

<장화, 홍련>의 장르는 무엇인가. 물론 호러영화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서브 장르에 속하는 걸까?

영화는 공식적으로 ‘귀신들린 집’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영화의 무대는 귀신이라도 나올 법한 시골집이고 이 집은 정말 ‘귀신들린 집’ 영화의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어딜 가도 사각을 품고 있는 방과 복도들, 피에 전 바닥, 정체불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계단….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귀신들린 집’ 영화의 공식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집의 존재감은 여전히 강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으스스한 사건들은 대부분 주인공 수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머리 푼 귀신, 새엄마의 학대, 피에 젖은 자루, 심지어 동생 수연과 새엄마 은주의 존재도 수미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이 모든 사건들은 새엄마에 대한 시기와 증오 때문에 동생과 엄마를 잃은 수미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죄의식과 타협하고, 싸우고, 무시하는 과정이다.

곧 두편의 선례가 떠오른다. 하나는 허크 하비의 컬트호러영화 <영혼의 카니발>이고 다른 하나는 그뒤에 나온 로만 폴란스키의 <리펄션>이다. 두 영화 모두 소름끼치는 건물이나 아파트를 주요 무대로 하고 있고 그 건물 속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한 여성의 환상이다. 이 존재할까 말까 망설이는 서브 장르의 한쪽 끝에는 좀더 전통적인 귀신들린 집 이야기인 헨리 제임스의 <나사못 회전>이나 셜리 잭슨의 <더 헌팅 오브 힐하우스>가(두 작품 모두 영화화되었다), 다른 쪽 끝에는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같은 작품들이 서 있다.

나오는 귀신들이 모두 환상이라고 해서 <장화, 홍련>이 ‘귀신들린 집’ 영화의 자격증을 박탈당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가장 모범적인 ‘귀신들린 집’ 영화인 <더 헌팅>이나 그 원작인 <더 헌팅 오브 힐하우스>와 같은 작품들이 그 모호한 경계선을 탐구하고 있는 동안은 말이다. 훌륭한 ‘귀신들린 집’ 영화들이 진짜로 탐구하는 것은 무대로 삼은 불길한 공간이 주인공의 심리에 끼치는 영향이지 진짜 귀신은 아니다(그리고 이 영화에 귀신이 정말 안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무대가 되는 공간과 드라마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장화, 홍련>은 관객에게 무엇을 제공해주는가? 그것은 일련의 자극적인 공포 경험이다. 그럼 그 경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호러영화 <장화, 홍련>은 원작인 <장화홍련전>보다 그랑기뇰(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행한 망령, 살인, 폭동 등을 그린 잔혹한 연극)의 전통에 더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추상적인 제의에 가깝다. 드라마는 말 그대로 그 공포 경험에 질감과 깊이를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이다. 이 영화의 드라마는 마치 자체의 힘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만 사실 대부분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일련의 공포 경험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드라마와 공포 경험의 불균형

영화의 비현실적인 무대 역시 그런 추상성을 강화한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은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느 미친 정신이 끝도 없이 상징화시키고 유형화시킨 환상이다. <장화, 홍련>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가면극이고 처음부터 연극적인 속성을 띤다. 여기서 원작은 엉뚱한 틈으로 영화 안에 비집고 들어온다. <장화, 홍련>은 <장화홍련전>을 각색한 영화가 아니라 자기 혼자서 <장화홍련전>을 연출하고 연기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죄의식에 전 주인공이 탈출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고통의 제의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지옥에 가깝다.

<장화, 홍련>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후반이다. 영화가 꾸준히 쌓아올렸던 긴장감은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는 후반부터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건 진상이 밝혀져 맥이 풀렸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이야기의 모든 사건들이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고 해도 주인공의 고통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관객의 연민과 공포 역시 남는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악몽과 죄책감은 좀비들로 가득 찬 백화점보다 탈출하기 어렵다.

문제는 드라마와 공포 경험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수미의 이야기는 흘러가는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 철저하게 과거의 한 시점에 고정되어 있는 박제된 경험의 반복이다. 새엄마와의 갈등, 수연과 엄마의 죽음과 같은 ‘드라마’는 대부분 우리의 시야 밖에서 존재한다.

이 둘은 처음부터 아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 영화에서 드라마는 수연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수미와 은주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가 신경쓰는 공포 경험은 철저하게 수미의 시점에 고정되어 있다. 진상을 알게 된 뒤부터 관객은 그 불균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후반부에 은주 자신의 공포 경험을 묘사하지만 아무래도 이 정도로는 모자란다(또는 넘친다. 수미의 경험이 주가 된 상태에서 은주의 경험은 형식적으로 사족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관객을 기만하는 (기만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서술 트릭 속에 얽히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특히 서술 트릭이 드라마와 공포 경험을 밀어내고 주인공 행세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말이다. 영화는 후반 20여분 동안 왜 이렇게 일이 풀려가는가를 설명해주기 위해 장황하게 해설을 늘어놓는다. 영화는 운명의 순간으로 돌아가 수미와 은주를 악몽으로 몰아넣은 비극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김지운 영화가 차가운 이유

이런 결말은 <메모리즈>와 같은 단편에서는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장화, 홍련>과 같은 장편에서는 문제가 된다. 물론 사건의 설명은 좋은 드라마의 결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사건 해결 과정이 드라마 자체인 추리물일 경우나 그렇다. <장화, 홍련>에서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은 드라마가 아니다. 논리적으로 이 이야기는 이와는 다른 결말을 요구한다. 수미의 반복되는 악몽이 어떤 식으로 종지부를 찍거나 (그게 파국이건 희망의 시작이건 말이다) 수미의 의식 밖에서 벌어지는 드라마가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거나 말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과거의 한 점에서 고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이야기의 정서적 클라이맥스는 필요하다. <장화, 홍련>에는 그런 것이 없다.

지금까지 나온 김지운 영화들의 결말은 늘 조금씩 차가웠다. 차가움 자체를 보편적인 극적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영화들에서 그런 차가움이 장점이 되었던 예는 거의 없었다. 그의 영화들은 늘 후반부에 도달하면 에너지와 정서적 힘을 잃었고 결말의 논리는 그 빈틈을 채우지 못했다. 비교적 짧은 단편이었던 <메모리즈>가 예외라면 예외일까.

<장화, 홍련>도 그런 차가움의 한계를 드러낸다. 따지고보면 후반의 설명 과정이 빚어내는 형식적 난장판 역시 그런 차가움의 부작용이다. 나는 영화가 어떻게든 정서적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면 결말의 구성 역시 더 나아졌을 거라고 믿는다. <장화, 홍련>은 여전히 흥미로운 영화지만 인간적 감정이 지배하는 드라마보다는 정신질환 사례에 대한 보고서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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