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스토리>, <아프리카의 여왕> 등 영화에서 강인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60년간 개성적인 연기를 펼쳐 온 배우 캐서린 헵번이 29일 9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대리인과 거주지 당국이 발표했다. 헵번의 대리인은 그녀가 29일 오후2시50분 (한국시간 30일 새벽3시50분) 출생지인 코네티컷주의 자택에서 가족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영화와 연극, 뮤지컬 등 여러 장르에서 극도로 세련된 연기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헵번은 87세의 고령에도 연극무대에 설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으나 노년에 접어들면서 오랫동안 파킨슨 병을 앓아왔으며 최근에는 고관절 수술 등으로 여러 차례 입원하는 등 건강이 악화돼 왔다.
헵번은 <모닝 글로리>(1933),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 <겨울의 사자>(1968), <황금연못>(1981) 등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4차례나 수상하고 12차례 지명됐다. 이 기록은 지난 해에야 메릴 스트립에 의해 깨졌다.
그러나 헵번은 "내가 이룬 것의 세 배는 할 수가 있었는데"라며 항상 자신의 연기에 미흡해 했다. 헵번은 1928년 뉴욕 무대에 `요즘 나날`로 데뷔한데 이어 브로드웨이에서 `전사(戰士)의 남편` 역할로 인기를 얻어 할리우드에 진출했으며 1932년 <이혼 협정>으로 스타가 됐다.
그는 불과 세번째 출연한 영화 <모닝 글로리>로 첫번째 오스카상을 수상했으며 그 후 <작은 아씨들>, <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 등에서 명성을 얻었으나 한때 "흥행에 독이 된다"며 기피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쓰인 코미디 <필라델피아 스토리>로 뉴욕 무대에서 다시 성공을 거둔 뒤 할리우드로 돌아와 제임스 스튜어트, 케리 그란트 등과 같은 제목의 영화를 찍은 뒤 헵번은 톱스타로 떠올랐고 이후 <아프리카의 여왕>, <지난 여름 갑자기>, <밤으로의 긴 여로>에 출연했다.
헵번은 1969년 뮤지컬 <코코>에서도 주연을 맡았으며 1976년 <중력의 법칙> 출연 때는 발목이 부러져 휠체어를 탄 채 연기했다. 1982년 75세의 나이로 브로드웨이에서 <웨스트사이드 월츠>에 출연할 때는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이 연극을 보스턴에서 공연할 때 한 관객이 사진을 찍자 연기를 중단하고 이 관객에게 나가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평생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말하고 인습을 깨뜨리는 과감한 행동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07년 5월12일 뉴잉글랜드의 부유하고 진보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헵번은 유명한 비뇨기과 의사인 아버지와 여성참정권 운동가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가정교사와 사립학교 교육을 받은 뒤 브린 모어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증권회사에서 일하다 1928년 뉴욕 연극무대에 데뷔한 헵번은 그해 필라델피아의 사교계 저명인사인 러들로 오그덴 스미스와 결혼했으나 6년 뒤 이혼했다. 결혼에 관한 그녀의 견해는 "사랑하면서 명예를 지키고 순종한다는 것은 끔찍하게 비현실적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헵번은 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하워드 휴즈 등 유명한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지만 9편의 영화를 같이 찍은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를 1967년 그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면서 평생 동반자로 지냈다. 이들의 관계를 두고 한 비평가는 "긴장한 경주마와 끈기있는 짐수레말의 결합"에 비유하기도 했다.
헵번은 1982년 교통사고로 한쪽 발을 잃을 뻔한 중상을 입었으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해 말 닉 놀테와 함께 코미디 <그레이스 퀴글리>에 출연했으며 87세 때인 1994년에는 워렌 비티의 설득으로 로맨틱 코미디 <러브 어페어>에 비티의 숙모역으로 출연하는 등 노년기에도 연기를 계속했다.
1999년 미국영화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설적인 여배우 1호'로 꼽힌 헵번은 50여편의 출연작을 남겼으며 77세 때 베스트셀러 "<아프리카의 여왕> 촬영기"를, 84세 때 자서전을 남겼다. (올드 세이브룩 <美코네티컷州> AP.AFP=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