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티콘으로 지은 에피소드의 城, 가볍고 유쾌한 그들의 사정인터넷 소설을 가로지르는 네가지 명제
인터넷 소설은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미리 추정되었다. 사이버 안에 지어진 그곳은 할일없이 킬킬대거나, 철없이 빈둥거리는 백조, 백수들이 들락거리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무시를 무색하게 할 만큼 수많은 ‘정상인’들이 그 놀이터를 찾았고, 영화는 그 수치를 확인하자마자 그들 편에 섰다. 이제는 그곳의 무엇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인터넷 소설, 또는 그 영화화의 과정에서 작동하는(하리라 예상되는) 수많은 다른 명제들. 여기 제시하는 4가지 명제는 그것들 중 처음 선택한 4개의 열쇠이다.
2003년 현재 충무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터넷 소설과 영화 사이의 합종연횡, 또는 친교의 난장. 이 미완의 영화문화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 먼 길을 도는 듯하지만 1997년과 1998년 사이버 문화와 영화 사이에 연행된 두 가지 만남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첫 번째 사례, 1997년 통신망 인기 연재 소설 <퇴마록>이 영화화되었다. 기독교와 민간신앙을 끌어들이고, 판타지 양식과 호러 장르를 연접시키면서 <퇴마록>은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영화 테크놀로지의 진전을 선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양한 주석이 따라붙을 만한 풍성한 이야기로 각광받았다. 예를 들어 <퇴마록>에서 등장하는 군인 요괴는 공포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인 ‘억압된 것의 회귀’와 ‘낯선 친숙함’을 드러내는 설정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1998년 개봉된 <접속>이다. 멜로드라마의 장르 안에서 당대에 유행했던 컴퓨터 문화를 소재로 끌어들인 시도였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만남이 현실 공간으로 이어지며 각종의 문화적 외피들- 사라 본의 음악과 피카디리극장- 이 따라붙었고, 또 관객을 사로잡았다. 사라 본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고, 피카디리극장 앞에는 연인을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뤘다. 영화 속 인물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스크린 바깥에 있는 우리의 삶의 방위까지 지휘한 것이다. 이 점은 <접속>이 컴퓨터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20대 초·중반 전문직 여성을 주요 관객층으로 상정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총론 | 인터넷 소설=이야기+라이프 스타일
거칠게 말하면, 최근의 인터넷 소설 영화화 붐은 바로 이 ‘이야기’와 ‘라이프 스타일’에서의 새로움 때문이다(여기에 인터넷과 상관없어 보이는 한 가지 사례를 덧붙일 수 있다. 여고생들의 구전 이야기를 영화화한 <여고괴담>. 이제 여고생들은 피억압자이기 이전에 듣고 보고 꿈꾸는 그들의 욕망을 인터넷에 올리며 발산의 출구를 찾는다). 인터넷은 확장되었고, 또 ‘일상의 일환’이 되었다. 네티즌들은 자신의 일기장을, 자신의 경험을, 때로는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가면서 익명의 만인에게 공개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하다.
“전 수다떨 곳이 아~~~주 절실히 필요해서 다섯개의 검색 사이트를 다 뒤져 여기로 왔어요. 눈이 빠질 거 같군요(~.~).”_<옥탑방 고양이>
그들은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기반으로 경험이건 창작이건 그 ‘이야기’의 소재를 찾아낸다. 때문에 특별히 어떤 창작의 고통을 요구하는 ‘작품’보다는 즉자적이고 거친, 그러나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에피소드’를 나열한다. 그리고 영화는 놓치지 않고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그 라이프 스타일, 그 이야기를 끌어당겨 각색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연인일 수도 있는 엽기녀와 어느 이층집 골방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동갑 사이의 이상한 과외, 수많은 옥탑방에 살고 있을 동거인들. 인터넷 소설은 바로 현재의 이야기-텍스트이며 동시에 라이프 스타일이다.
인터넷 소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연이어 관객을 사로잡는 동안 <연애소설> <국화꽃향기> 등 ‘종이’ 소설의 영화화가 흥행연패에 빠지는 것은 비단 영화의 미약한 완성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일련의 관객은 문학적 기승전결의 전형을 선호하기보다 자신의 바로 옆에서 벌어졌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에피소드들에 감정을 이입한다. 따라서, 인터넷 소설이 보장하는 ‘관객인지도’라는 산업적 보증수표는 일종의 서사강박증 탈피현상을 설명하는 다른 말이다. 이것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했지는 의문이지만 인터넷 소설에는 놓쳐서는 안 될 전복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화술이다.
명제1 |
세상의 주인은 ‘나’다-오직 1인칭으로 말하라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 <옥탑방 고양이>의 기본적인 공통점은? 소재는 다르지만 모두가 1인칭 화법으로 소설을 써나간다는 점이다. 그것이 뭐가 그리 대수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너무 많이 길들여져 있다는 증거다. 물론, 종이 소설에도 1인칭이 쓰인다. 그러나 인터넷 소설의 1인칭 화법은 전체의 격식을 따져 섬기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마치 다함께 일기장을 나눠 보는 듯한 기분으로 전개된다. 작자가 곧 화자이므로 눈물이 나올 때는 울고, 쌍욕이 나올 때는 한다. 독자와 관객은 ‘나’라는 목소리를 따라 인도된다.
경험을 회고하는 형식이 아니더라도 이 점은 인터넷 소설의 철칙이다. 나의 생활반경과 인식을 넘어서지 않는 것. 아는 만큼 말하고, 느끼는 솔직함은 10대 여고생들이 상상하는 허구에도 적용된다. 여기에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다만 모든 첫 번째 장에 등장하는 ‘나’를 따라가라. 이런 점에서, 영화화 대기 중인 <내사랑 싸가지>(이햇님), <늑대의 유혹>(귀여니), <그 놈은 멋있었다>(귀여니) 등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계 내에서 주인공을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나이와 유사한 고등학생 ‘나’를 설정한다. 이야기 또한 그들이 알만한 ‘짱’과 ‘닭’과 ‘싸가지’의 사랑싸움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화자의 설정에 따라 그들만의 세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여고생들의 감성적인 자아도취에 따른 결과라고는 말 할 수 없다. 30살을 넘은 <백조와 백수>의 엉망진창 러브 스토리에도 이 점은 적용된다.
백조: 오늘 친구가 결혼한다/ 비참하다… 여자 나이 30… 나만 솔로다… ㅜ.ㅜ/대학 때 결혼한 친구는 애까지 끌고 와서 “아줌마한테 인사해야지~~” 했다… 애만 아니면 한대 후려칠 뻔했다.
그런데 이 ‘나’가 이제는 한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인터넷 소설의 동등함이다.
명제2 |
그/그녀들은 나와 동등하다 - 수직적 질서, 권위 따위엔 신경 꺼!
나와 그/그녀들은 동등하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네티즌 문화의 혁명성과 모종의 결핍이 모두 이 항목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언제는 동등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런 적이 없다. 기성 세계는 온갖 위계질서로 짜깁기되어 있고, ‘고전적’소설은 대개 세상의 위계질서를 내면화한 혹은 그에 격렬히 저항하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러나, 인터넷 소설은 세상의 위계질서엔 관심이 없다. 당장 내게 필요한지 의미있는지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이 당당한 태도는 어디서 오는가. 그건 인터넷 세상이 평등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공간에선 하나의 ID로 존재할 뿐이다. 권력이나 재산이 특정 ID를 더 강하게 만들 순 없다.
예를 들자.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지훈과 수완은 사는 ‘급’이 다르다. 수완의 아버지는 IMF 당시 실직했으며, 그 때문에 어머니는 닭집을 차렸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수완은 ‘닭대가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화자 수완은 어떤 콤플렉스도 갖지 않는다. 수완은 생각한다. 그래 나는 돈만 받아가면 되니까(이 점은 만화 <그 녀석과 나>와의 가장 큰 차이이다. 만화에서 ‘수안’은 벤츠를 몰고 다니는 ’시겸’을 마음에 둔다). 객관적으로 읽히는 계급적 수세에도 불구하고 수완은 그런 조건에 피해의식을 투영하지 않는다. <옥탑방 고양이>의 **은 미와 부를 겸비한 **에게 인간적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가 관심 갖는 건 괜찮은 직장에서 월급받아 먹고 사는 일이다. 속상해하긴 해도, 자신의 초라한 물질적 조건을 비극화하지 않는다. 과연 이것이 현실에서도 가능한 감정일까? 원작자 최수완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울지 않기 위해서 웃긴 것일 거라고. 정확히 이 말은 인터넷 소설이 갖는 ‘나’들이 또 다른 ‘나’를 만나 관계를 지을 때 전제가 되는 동등함의 인식이다. 부연 설명하자면, 울음의 출생지는 여러 곳이지만, 웃음은 수평적 질서에서 태어난다. 군대에 막 입대한 신병이 웃으면 기합받는 건 그 때문이다. 웃음은 탈권위와 평등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수평적 사고는 종종 서사의 결함을 초래한다. 때로 캐릭터 자체가 평면화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동등한 인물들은 자신의 내면에선 이야기를 이끌어갈 에너지를 발견하기 힘들다. 많은 인터넷 소설들이 과거를 다루지 않는 점을 상기해보자. 세상의 오래된 혹은 과거와 연관된 위계질서로부터 비롯된 내면적 강박과 콤플렉스가 사라지면 이제 중요한 건 현재의 사건과 가까운 미래뿐이다. 따라서 인물들에게 얽힌 전사, 또는 복잡한 상황은 제거되고, 몇 가지 충돌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강박증 없이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외면이 신파의 조율 안에서도 미열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고전적 서사의 규범으로부터의 이탈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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