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 동안 김승범 튜브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충무로의 뉴스메이커였다. 일신창투 수석심사역 시절 <은행나무 침대>에 투자함으로써 충무로의 금융자본 시대를 열고, <접속> <조용한 가족> 등으로 주목받던 그가 본격적으로 ‘입방아’에 오른 것은 2000년 튜브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하면서부터다. 의욕적인 출발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튜브는 단단한 덫에 걸렸다. 튜브는 배급시장에서 빨리 자리를 잡기 위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튜브> <데우스 마키나> <내츄럴시티> 같은 엄청난 예산의 영화들을 앞에 내세웠다 하지만 이 ‘블록버스터 노선’은 도리어 튜브의 발목을 붙잡았다. 여러 편의 초대형 영화를 동시에 굴리느라 자금은 바닥났고, 제작은 늘어지기만 했다. <…로스트 메모리즈>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얻으면서 튜브는 오리온, 유니코리아, CJ엔터테인먼트 등과 인수 협상을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 다행히도 <집으로…>가 성공해 기력을 차렸지만,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던 <성냥팔이…>는 대실패라는 결과를 빚었다.
이건 KO 펀치였다. 이미 충무로의 금융자본은 급속히 위축되기 시작했고, 튜브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탈출구는 없어 보였다. 누구도 김승범 대표가 쉽게 재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올해 초 모 회사인 튜브인베스트먼트와 CJ엔터테인먼트로부터 대규모의 자금을 받아내 배급시장에 복귀했다. 튜브의 재기작은 회사 이름과 같은 <튜브>. 멈추지 않는 열차처럼 힘겹게 충무로 전장에 복귀한 김승범 대표를 만났다.
<튜브>로 배급시장에 돌아왔다. 성적은 어떤가. 개봉 주말 전국 25만명 정도, 어제(6월11일)까지 전국 34만명 정도 들었다. 만족하지는 못하는 수치다.
성적이 기대 이하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우선 극장에 손님이 줄었다. 일요일엔 축구도 있었고. 기본적으로는 관객이 이 영화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불신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리뷰에서도 이 정도면 볼 만하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대구 참사로 개봉이 밀린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그야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래도 해외 판매가 좋아 부담은 덜었을 것 같다. 그렇다. 칸영화제 마켓에서 일본에 200만달러가 조금 안 되게 팔았고 미국, 프랑스, 영국 등에도 괜찮은 조건으로 팔렸다. 칸에서 판매한 총액은 254만달러인데, 사스 때문에 오지 못한 홍콩, 대만 등 동남아시아 시장을 더하면 280만달러 이상이 될 거다. 제작비의 절반이 넘는다.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결국, 한국에서는 100만에서 120만명 정도만 동원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 지금 추세라면 최소한 큰 손해를 보지야 않겠지만, 조금 초조한 상태다.
개봉 전 영화 담당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배우의 사진촬영 현장까지 직접 나갔다고 들었다. 무척 긴장했던 모양이다. 칸 마켓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해외에서 이 정도로 팔린 건 대단한 일이다. 사전판매도 아니고 직접 영화를 보여주고 판 거니까. 외국에서는 열광하는데 한국에서 시큰둥한 걸 보면, 한국 관객의 블록버스터에 대한 불신감이 크긴 큰가보다. 그래도 아직 기대는 저버리지 않고 있다.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면, 글들이 엄청 올라오는데 80%가 좋은 쪽이다. 어쩌면 큰 기대없이 영화를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와일드카드>가 그랬듯이, 호의적인 관객의 힘을 업고 오랫동안 상영하는 방향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9월 개봉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후 9개월 만에 배급시장에 돌아왔다. 꽤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 같다. <성냥팔이…> 이후 부도 위기를 겪었다. 100억대 채무를 진 채. 그 다음부터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논의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과 끈질기게 교섭했고, 이게 실패한 뒤에는 미국계 펀드와 협상을 했다. 거의 투자 직전까지 갔었는데, 뉴욕 본사에서 이야기를 틀었다. 그렇게 힘들어지면서 결국 고맙게도 튜브인베스트먼트가 투자를 결정했다. 올해 초 튜브인베스트먼트가 50억원을 증자해줬고, CJ엔터테인먼트가 15억원을 투자하면서 자본금이 80억원이 됐다. 또 튜브인베스트먼트가 40억원 정도를 대여해줬다. 그러니까 100억원 정도가 수혈된 거다.
그럼 채무는 다 해결했나. 그렇다. 그리고 참 고마움을 느낀다. 충무로의 수십개 업체가 채무를 탕감해줬고, 창투사들도 채권을 갖고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튜브픽처스도 잘 참아줬고. 튜브인베스트먼트의 문성준 대표는 생명의 은인이고, 다른 주변 분들도 나를 살려주셨다.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어떻게 재기할 의욕을 불태웠나. 힘들긴 힘들었다. 어떤 날은 전화가 한통도 안 온 적도 있었다. 오후 2∼3시까지는 기분이 너무 좋더라.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면 불안해졌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고. 그래도 한번도 포기한 적은 없다. 계속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노력했다.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모두 내 책임이라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구 보증 섰다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돈을 떼인 것도 아니라 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닌가. 일이 안 되더라도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니까 담력이 생기더라.
지금은 전화가 많이 걸려오나. 정신이 없을 정도다. 충무로가 어려워서 그런지 시나리오가 폭주한다. 재밌는 게 요즘엔 설익은 기획이 별로 없다. 시나리오도 굉장히 탄탄하고, 어떤 경우엔 배우와 투자자본이 일부 확보된 경우도 있을 정도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튜브엔터테인먼트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이전처럼 영화에 전액 투자를 한다든가 하진 않을 생각이다. 철저하게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간다. 사실, 원래도 그런 노선이었지만, 투자가 잘 안 되고 우리가 그걸 떠안다보니까 엄청난 프로젝트가 많아진 것 같다. 영화도 최소한 전체 제작비의 70~80%가 모이고 좋은 배우가 결정된 뒤에야 들어갈 생각이다. 대신 배급대행료를 주소득원으로 삼을 생각이다. 1년에 10여편을 배급해 관객을 1천만명 모으면 대충 24억원이 나온다. 그 정도면 회사를 운영하기엔 충분하다. 내년부터는 1년에 대형 외화 2편, 중급 외화 2편, 튜브픽처스 영화 2∼3편, 다른 한국영화 5∼6편, 배급대행작품 4∼5편 정도를 배급할 계획이다.
요즘 분위기로 볼 때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투자 분위기는 많이 죽었지만, 그렇다고 영화에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중해졌을 뿐이지. 신뢰있는 메인 제작사, 배급사의 경우 오히려 좋아지는 환경이다. 우리 같은 배급사가 영화 개발을 주도하고 자본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 된 거다. 이제 일확천금을 노리는 초짜 제작자들은 빠지고 프로페셔널만 일할 수 있게 된 거다. 지금의 구조조정은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본다.
튜브인베스트먼트는 대주주 이상의 지위인 것 같다. 영화를 선택하는 시스템을 완전히 바꿨다. 예전에는 나와 황우현 전 이사가 결정했다면 지금은 제작, 배급, 마케팅, 해외세일즈 등 각 부문 담당자들의 회의를 통해 정한다. 여기에 자금 분야로 튜브인베스트먼트의 펀드매니저가 참여한다. 투자를 받기 위한 이런저런 전략을 논의한다. 그게 굉장히 좋다. 말이 투자·배급사 대표지, 3년 동안 실제 내 직업은 무작정 돈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이젠 영화에만 몰두할 수 있다. 문성준 대표의 영화에 대한 식견도 무척 올라가 내가 독단에 빠지는 것을 견제해준다. CFO 역할을 해주는 거다. 그러면서 나는 굉장히 많은 걸 배우고 있다.
튜브픽처스는 독립해 나갔다. 그렇다. 이제 아무런 지분관계가 없다. 이름만 같을 뿐이다. 사실, 황우현 튜브픽처스 대표가 없어서 아쉽고 허전하다. 하지만, 그동안 나와 성향이 너무 비슷해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뭔가 제어되지 않는다는 점에선 문제였다. 어찌됐건 튜브픽처스는 가장 중요한 제작사다. 1년에 2∼3편을 거기서 조달할 계획이다.
같은 배급사인 CJ로부터 투자를 받았는데. 채권액이 좀 있었고, 전액 회수하기엔 우리 자금 사정이 안 좋아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출자 결정을 내리더라. 그 덕분에 자본도 확보했고 신뢰도도 높일 수 있었다. 사실, 내가 보기에 그 15억원은 비즈니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배려라고 본다.
<튜브> 이후 올해 라인업은 어떤가. 우선 8월1일 <툼레이더2>가 있다. 8월 하순에는 정초신 감독의 <남남북녀>, 9월5일에는 민병천 감독의 <내츄럴시티>, 9월26일엔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 10월17일에는 이와이 순지 감독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10월31일에는 이언희 감독의 <…ing>, 11월21일에는 리처드 도너 감독의 <타임라인>, 12월엔 이건동 감독의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가 있다. 내년 상반기에는 <미이라> 시리즈의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반 헬싱>이 있고, 김정화·권상우의 <데우스 마키나>, 이효리 주연의 <삼수생의 사랑이야기>,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도 기다리고 있다.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다고 본다.
아무래도 또 다른 블록버스터인 <내츄럴시티>에 관심이 간다. 한마디로 기대하시라, 다. 우리 사무실은 <내츄럴시티> 이야기만 나오면 붕붕거리는 느낌이다. 비주얼이 엄청나고, 많은 분들의 우려와 달리 드라마도 훌륭하다. 나의 명예회복도 여기서 하고 싶다. 블록버스터에 대한 죄값을 확실히 치르려 한다. 칸에서도 프로모션 필름을 틀었는데, 프랑스의 카날플뤼스가 바로 계약하자고 달려들었다.
블록버스터를 계속할 생각인가. 그렇다. 이번 칸에서 실감했다. 이런 정도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아시아에서 한국밖에 없다. 그리고 제작비도 절반을 회수할 수 있지 않나. 블록버스터야 말로 가장 영화적인 영화 아닌가. 산업화를 위해서도 시장을 이끌어갈 블록버스터는 필수적이다. <쉬리>가 없었다면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있었겠나. 칸에서도 아시아 바이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40억∼50억원짜리 영화를 잘 만들 자신이 있으니 절반 정도를 투자하지 않겠냐는 제안에 관심이 많더라. 한 일본 배급사는 <데우스 마키나>에 50만∼70만달러 정도를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계산에 약하다는 거다. 몸집만 키우면 관객이 극장에 오겠지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블록버스터일수록 더 치밀해야 하고 드라마도 더 꼼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한국의 경우 캐스팅도 좋아야 한다. 이런 노력 속에서 블록버스터에 대한 불신이 해소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시련을 겪으면서도 영화업에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뭐기에. 영화는… 아름다운 물귀신이랄까? 사실, 이번에 고생하면서 정말 큰 것을 얻었다. <성냥팔이…> 이후 강우석 감독은 거의 1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주고 술자리에 불렀다. “100억짜리 영화도 만들고 7억짜리 영화도 만든 이런 놈이 없어지면 큰일난다”고 위로해주더라. 주변 사람에게도 김승범 도와주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문성준 대표도 그렇고, 다른 제작자 분들도 많은 격려를 주셨다. 사업적으로는 갈등도 하고 그런 사이지만, 어려워질 때 묘한 동료의식을 발휘하는 그런 축축한 면이 물귀신처럼 나를 붙드는 것 같다. 충무로는 돈 놓고 돈 먹기의 시장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돈이나 명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 그러니까 인생을 배웠다.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그런 게 없어졌다. 그냥 좋은 영화를 하고 싶다는 것 정도? 예전엔 업계 1위를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상장이라든가 떼돈을 번다는 생각도 암암리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갚자는 생각뿐이다. 회사를 안정시키고 남들을 도울 능력을 갖추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