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계단 바로 앞방이 수미라는 맏딸이 쓰던 방입니다. 층계참부터 그랬지만 2층의 방들은 전부 꽃무늬 벽지로 발라놓았어요. 샌더슨이라는 영국 사람 작품이라네요. 여자아이들이 이런 방에서 자라면 자기도 꽃인 줄 알고, 세상은 동화 속 같은 줄만 알겠죠? 더러운 꼴 참고 사는 게 인생인데, 쯧쯧. 북향 방이지만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창까지 창이 세개나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환해질 수 있는 방이에요. 하지만 저렇게 무거운 커튼이라면 오후 3시에도 한밤중처럼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낮잠을 많이 자는 소녀였는지…
이 방의 침대는 더블베드예요. 워낙 두 자매가 사이가 좋아서 달리 친구없이 둘이서 붙어다녔는데, 언니 방 침대가 아마 둘에게 편한 놀이터였나봐요. 침대 발치에 있는 건 뚜껑을 열 수 있는 의자예요. 귀중품이나 내놓기 싫은 물건들을 차곡차곡 담아둘 수 있는. 감탄하실 줄 알았어요. 뚜껑 달린 책상에 오밀조밀한 액자에 조그만 괘종시계까지. 무척 곰살궂고 화사한 여자아이가 눈에 선하죠? 그런데… 뭔가 이상하긴 해요. 바탕은 분명히 공주방인데, 시퍼런 이불이나 새빨간 붙박이장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잠깐 살면서 난폭하게 멋대로 들여놓은 살림 같잖아요? 아니면 엄마가 꾸며주는 방이 지겨워진 사춘기 소녀의 서툰 반항인지도 모르지요.
마루 건너편으로 가시면 막내 수연이가 쓰던 방입니다. 벽지의 꽃송이가 한결 앳되고 사랑스럽지요? 그렇지만 수연이야말로 꽃무늬 따위 필요없는 애였어요. 어쩌다 살짝 웃으면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죠. 보통은 언니한테만 보여주는 미소였지만.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었죠. 뭐든지 언니 하는 대로 따라하는 말없고 여린 꼬마였는데, 지금은 많이 자랐겠네요. 몇살이었냐고요? 아, 요람이며 인형이며 어린아이 물건이 방에 그득해서 물으시는 거군요.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네요. 열네살은 되었을 텐데. 맑은 연두색이랑 온통 파스텔로 그려놓은 듯한 방이라 볕이 들면 하얗게 가구 빛깔이 떠올라 거의 창백하기까지 하답니다. 벽이 경사져서 방 안 공기가 비뚜름히 기울어진 느낌이죠? 박공 지붕 밑방이라 그렇답니다. 이 방에서 수연이가 더 나이를 먹었다면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경사진 벽에 이마를 부딪혔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방이 끝이냐고요. 뭐 대충 그렇습니다. 사실 이 집에는 원래 네평쯤 되는 다락과 지하실 광도 있었는데, 못 쓰게 되었다네요. 다락방은 딸아이들이 숨어서 위험한 장난을 쳐서 못을 쳐버린 모양이에요.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마녀놀이 같은 거였겠지요, 뭐. 집이 이렇게 오래돼서 삐걱거리다 보면, 어린애들만 야단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요. 그렇지만 지하실은 제가 봐도 섬뜩했어요. 일본식 옛날집에 흔히 있는 독을 묻어놓은 광이었는데 땅에 줄지어 파묻어놓은 간장독에 둥실둥실 떠 있는 메주가 꼭 해골 정수리처럼 보여서 말이에요, 하하, 죄송합니다. 그럼 그만 돌아가면서 마음을 정하시겠어요? 아, 잠깐만요, 저기 누가 창문을 노크하네요. 누구세요?
“모르시겠어요? 저, 수미예요. 저희 식구들, 이 집… 팔지 않기로 했어요. 그 말씀드리려고 멀리서 찾아왔는데 사무실에서 이리로 가셨다고 해서요.”
아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요. 얼마만에 찾아온 손님인데 하필 오늘 마음을 바꾸다니 기가 막혀서! 손님 돌아가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뭔가 잘못된 거예요. 제가 다시 주인에게 연락을 취해서 꼭 계약을… 그런데… 여기, 2층 아니었던가요?
자료제공·구술 조근현/ <장화, 홍련> 미술감독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편집 권은주자료제공 · 구술 조근현/<장화,홍련> 미술감독
<장화, 홍련> 세트 뒷이야기나무로 지은 인형의 집
가족 괴담, 성장의 공포와 더불어 흉흉한 집을 중심에 두는 ‘하우스 호러’ 장르를 영화의 키워드로 설정한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은, 전남 보성군 율어면 율어저수지 부근의 야외세트와 양수리종합촬영소 안에 건설한 네개의 실내 세트로 자매들이 사는 집의 겉과 속을 재현했다. 세트를 짓고 외관과 내부를 꾸미는 데 소요된 비용은 약 8억원. 전체 미술비용이 예정한 크기의 2배에 달했다는 후문이다. 전남 보성의 야외세트는 애초 공포영화의 전형적 설정대로 물가의 땅을 점찍었으나, 사실적 공포를 전하려는 작품 의도에 맞게 일반인이 집을 앉힐 법한 양지바른 옆 땅으로 터를 옮겼다. 수미와 수연이 집에 도착하는 도입부에 등장하는 대지 300평의 이 야외세트는 밖으로 열린 시선의 출발점이 되기보다 바깥으로부터의 시선을 흡수하는 육중한 물체처럼 보인다.
실내 세트는 1층과 계단, 2층 거실과 수미, 수연 방 입구,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를 포함한 세트와 수미, 수연의 방, 화장실이 있는 세트의 둘로 나뉘어 지어졌다. 김지운 감독과 조근현 미술감독이 선택한 건축 양식은 일본식 가옥. 관객에게 생경하고 한옥에 비해 포용력이 떨어지며 벽과 기둥을 별도의 마감재로 감싸지 않고 노출시켜 구조적으로 복잡한 느낌을 자아낸다는 이유였다. 영화가 일본 스크린에 공개될 경우 이의가 제기되지 않도록 양식의 정확한 재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집의 연령이 30, 40년대 생으로 정해짐에 따라 <장화, 홍련>의 집 세트는 역사와 인물이라는 두 좌표를 갖게 됐다. 즉 주인이 바뀌며 시간의 더께가 앉았다 벗겨지고 다시 덧칠되어 여러 시대의 흔적이 혼재하는 공간이면서 각각의 방이 가족들 캐릭터의 연장(延長)이 된 것이다.
첫 번째 세트는 1층과 2층을 같이 만들었는데 이는 감독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연기자의 호흡이 1, 2층이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 호흡을 이어주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고 김지운 감독은 밝힌다. 덕분에 덩어리 공간을 모두 커버해야 했던 조명을 비롯해 미술, 동시녹음, 촬영이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김지운 감독의 또 다른 집착은 꽃무늬 벽지와 좁은 계단. <조용한 가족> 때에도 꽃무늬 벽지를 유난히 선호했다는 김지운 감독은 단순한 사방무늬 벽지를 물리치고 자매의 방을 꽃벽지로 도배했다. 계단의 폭은 촬영팀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을 고려해 조정됐다.
방을 앉히고 남은 자투리 공간에 복도를 만들지 않고 복도부터 먼저 설계한 것도 특기할 만한 점. 조근현 미술감독은 복도가 1층에서 2층으로, 자신의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인물의 감정과 의혹을 증폭하는 장치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공간의 연결부나 중간에 걸려 있는 공간, 1, 2층을 관통해 시선으로 구획지어지는 무형의 공간이 영화 속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구조를 세우고 내부를 완전히 드레싱하는 미술팀의 작업이 스크린 속 공간을 지배하는 <장화, 홍련>의 영화적 특성상 프로덕션디자이너, 전문 아트디렉터를 비롯한 미술 스탭, 소품 스탭과 세트 제작업체의 열정은 대단했다. 세트 장식에 들어갈 물품 후보 파일이 6권에 달할 만큼 까다로웠던 ‘인테리어 쇼핑’에 의상, 소품, 분장 분야 구별없이 뛰어다녔고 인형, 냉장고 등 스탭들의 개인 소장품도 큰 기여를 했다. 부와 기품을 과시하면서도 각기 어두운 사연이 있어 보이는 가구들은 알려진 대로 보광동 앤틱 가구점에서 까다롭게 대여한 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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