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기계를 만들어내고, 만화는 그 기계를 가지고 논다. 산업혁명의 공장과 굴뚝은 <철인 28호>다. 그 우람한 덩치가 뿜어내는 증기는 과학의 오만한 콧방귀다. 모터바이시클과 자동차는 <마징가 Z>다. 조종간을 잡으면 나의 몸은 증식하고, 이 거대한 쇳덩이를 마음껏 타고 내달린다. 건설현장의 포클레인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다. 아무런 인격도 없는 중장비이지만 그 단단한 현실감이 더 세련되어 보인다. 그런데 조금은 눈치챘는가, 이 수상한 역진화를? 과학이 발전할수록 만화 속의 과학은 점점 퇴화한다. 그리고 수렴한다. 만화 속의 기계와 현실 속의 기계의 폭은 점점 좁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 귀결은 바로 이것.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첨단의 기계를 다루는 만화. <영원의 안식처>(학산문화사 펴냄)가 그것이다. 그 기계란 무엇인가? 마음을 만들어내는 기계, 인간의 두뇌다.
아키바 료스케라는 신비한 남자는 타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의 기억을 살짝 조작할 수 있고, 때론 그 심리적 내상을 치료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당신이 어머니와 저녁을 먹는 식당에 들어와서 마치 당신의 형인 것처럼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백화점에서 명품을 잔뜩 산 뒤에 방금 돈을 지불한 것처럼 하고 그냥 나가버릴 수도 있다. 최면술사, 혹은 마음을 속이는 유령과 같은 판타지의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우료 후유미의 <영원의 안식처>는 이 마음의 조작자를 현대의 뇌과학이라는 첨단의 도구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터널 사바스(ES)라고 불리는 이 존재들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또 다른 초능력자가 아니다. 그에게 쉽게 조종되지 않는, 한마디로 ‘둔한 마음’의 연구 벌레들이다.
1990년대 이후 SF계열 만화의 소재에는 분명한 경향이 있다. 허무맹랑한 미래의 발명품이나 거대 로봇이 아니라 현대과학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이슈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키워드는 유전자 조작, 생명복제, 뇌과학 정도로 볼 수 있다. 요시다 아키미의 <야차>, 호카조노 마사야의 <견신>, 사토 마코토의 <돌연변이>(사토라레)가 대표적인 작품들로 여기에 등장하는 핵심요소들이 <영원의 안식처>에도 이어진다. 유전자 조작 인간과 복제(야차), 불로불사의 생명체(견신), 특정한 매개가 없는 사념의 전달(돌연변이)이 그것들로, 그런 면에서 볼 때 <영원의 안식처>는 특별히 ‘놀라운 아이디어’로 접근하는 만화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만화가다.
<영원의 안식처>는 분명히 같은 소재의 소년만화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차가운 미청년, 가늘게 빗어낸 머리카락, 빈번하게 사라지는 배경, 비교적 안정적인 수평구도지만 잘게잘게 나뉜 상념의 표현…. 여성만화의 숨길 수 없는 기법들이 작품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지 않은가? 그도 그럴 것이 만화가는 <보이 프렌드> <마르스>로 잘 알려진 정통의 소녀만화가 소우류 후유미다. 양부의 폭행과 쌍둥이 동생의 자살로 상처입은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마르스>)와 유전자 조작으로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 존재(<영원한 안식처>) 사이를 잇는 끈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음이다. 인간 두뇌 작용의 가장 불가사의한 부분인 ‘사랑’을 전문적으로 다뤄온 소녀 만화가가 이번엔 현대과학의 힘을 빌려 그 본질에 다가서려는 것이다.
<영원한 안식처>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이미지는 다른 SF만화에 등장하는 파괴의 장면들이 아니다. 여성의 신체와 같은 알집 속에서 말이 튀어나오고, 무성한 가시나무와 벌떼가 가혹하게 신체를 찌르는 등 마음속에 형상화된 초현실의 공포들이다. 소녀만화라면 두어 방울의 눈물과 난사하는 스크린 톤으로 그려졌을, 남자만화에서는 폭주하는 등장인물의 파괴의 형상으로 그려졌을 이미지들이 프로이트적인 상징의 코드로 절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상처와 사랑이다.
능력자 료스케의 비밀을 알고 그 신비에 접근하는 것은 뇌 과학자 쿠죠 미네로, 그녀는 ES가 쉽게 침투하지 못하는 둔감의 소유자다. “연구도 좋지만 여자로서의 공부도 좀 해야지 않겠어? 사랑도 못해보고 인생 종칠 일 있니?”라고 친구가 말하자 “그러니까 그 사랑이란 게 어떻게 발생하는지 일단 그 개념이 안 서”라고 대답한다. 료스케와 쿠죠는 일반인이 볼 때는 냉혈한으로 보일 만큼 차가운 태도를 가진 존재들이지만 그 냉담함을 통해 불가사의한 인간 감정의 비밀을 파고들게 된다. 이와아키 히토시가 <칠석의 나라>에서 보여주었던 ‘적당한 냉담함’이 이 중성적인 만화에서도 나쁘지 않은 감성적 중립을 부여하고 있다.이명석/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