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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 위험, 그리고 나른함, 분홍 고양이, <튜브>의 배두나

어쩐 일일까. 배두나는 친숙한 느낌을 준다. 스크린 속에서, 카메라 앞에서 혹은 인터뷰어와 함께 있을 때, 그러니까 배우가 자신을 배우로서 드러내는 방식들에 어떤 일관성이 있어서 그 사람의 안과 밖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라니,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그래도 이건 이색적인 착각이었다.

“아니, 배두나! 오늘의 의상 컨셉이…” 하며 친한 체하자 그는 “아아이~ ” 하며 다리를 꼬았다. 그녀 자신도 익숙지 않은 분홍색 치마는 <튜브>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튀는 영화임을 새삼 상기시켰다.

영화 속에서 갖고 다니던 클림트 그림 이야기를 꺼내자 대뜸 “그거 왜 가지고 다니는지 모르죠?”라고 묻는다. 당연히 모른다. 영화 안에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몰라…”라고 혼잣말을 한 그는 “아빠의 유품이에요. 그 안에 바이올린이 들어 있는데 돈 때문에 잃었다가 소매치기로 되찾은 거고요”라고 설명했다. 편집과정에서 사라지는 장면들은 늘 있다. 그래도 기타통이 비주얼적인 효과는 충분히 내더라고 말해주었다. 서운함이 지워지는 미세한 표정 변화 끝에 배두나가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기자의 시선을 받아 그것을 카메라에 되쏘는 피사체의 얼굴. 저 얼굴, 저 눈. 뚫어보고 제압하는, 서늘한, 쌀쌀한, 위엄과 위험… 무심한 듯 딴청 피우는… 나른한 귀여움… 안일하지도 만만치도 않은… 분홍 고양이 한 마리… 사랑스럽다…. 배두나가 카메라 앞에서 스틸 컷으로 연출하는 느낌들은 이런 모자이크를 이뤘다.

저 배우가 성장하면, 그러니까 마치 화가가 미세한 붓 터치를 거듭해가는 것처럼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키워가면 어떻게 될까.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가 문득 떠오르면서 이자벨 위페르의 여성적 카리스마를 우리 배우에게서도 보게 될까, 궁금해졌다.

<튜브>를 어떻게 보았느냐고, 그가 먼저 물었다. 한국의 블록버스터로서는 이색적이었다고 하자 “나도, 나도!”라고 맞장구를 쳤다. “지하철 세트랑 조명은 너무 잘하지 않았어요? 후면영사기법이라고 하는 건데 안에서 촬영할 때 진짜로 달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 멋있더라구요. 시사회 보고 되게 놀랐어요. 중간에 김석훈씨가 죽다 살고 죽다 살고 하잖아요. 유치한데 통쾌하던걸요. 박수치고 신나했어요. 액션영화라는 게 그런 재미가 있더라구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좀 머뭇거렸다. “음… (발바닥을 까닥거리며) 내가 맡은 부분은 멜로죠, 신파예요. ‘마지막에 대중들이 울어요’ 이럴 수도 없고. (웃음) 우리나라 스타일에 맞게 마지막 5분의 멜로 부분이 대중에게 잘 맞춰져 있지 않나? 모르겠어요. 우우… 대중성은….”

<튜브>는 배두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눠도 될 만큼 배두나의 몫이 선명했다고 하자 돌연 달변으로 변했다. “<튜브>를 결정할 때 욕심이 없었어요. 전형적이지 않게, 남자배우 둘이 튈 수 있게 조용히 내 역할 하고 조화되게 도와주자, 내가 이 영화에 잘 어울리는 타입은 분명 아니지만 튀지 않고 잘 묻어가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실 되게 걱정했어요, 액션영화 망칠까봐. 그렇게 컷 많이 쪼개는 영화는 처음 찍어봤고. <고양이를 부탁해>나 <플란다스의 개>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현실적인 영화하고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결과적으로 뛰어나진 않아도 잘 묻어가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지만 보는 방법에 따라 차이는 있겠죠. 저도 매맞을 준비는 되어 있구요.”

꽉 짜인 현실감 대신 배두나의 느낌을 끌어들인 여백, 배두나의 표현을 빌리면 ‘촉촉한 액션영화’는 백운학 감독이 계산하고 의도한 바였던 것 같다. “감독님이 저를 많이 믿고 맡겨주셨어요. 사실 <튜브>는 늘 해온 것과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어요. 영화 8편 찍고 7편째 개봉하는 건데 시나리오, 감독, 배우, 현장 분위기, 컷 수, 모든 게 달랐어요. 25살 미만의 배우 초기에, 무르익은 배우 되기 전에 겪어야 할 영화인 듯했어요. 그렇지만 제게는 색다른 경험으로 남을 것 같아요. 어차피 전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생겼고 연기하는 방식, 어필하는 방식도 다른 것 같고. 누가 머리 질끈 묶고 달리는 관리사무소 여직원을 쉽게 첫 영화로 택하겠어요? 어떤 땐 너무 슬퍼요, 내가 설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그래도 좋은 작품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해요. <살인의 추억>이 잘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최근의 배두나는 <위풍당당 그녀>라는 TV 미니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너무나 즐겼어요. 목숨 걸고 열심히 했고 후회없이 만족해요. 내 영화들을 위해 이걸 잘해야 한다고 눈에 불을 켰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뿌듯하던걸요. 내가 얼마나 대중과 멀리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어요. 한번이나마 배두나는 이런 타입입니다, 알려준 것이 만족스러워요.”

이해와 격려의 말이 입 안에서 맴돌고 머리 속에서는 미래의 배두나 모습과 이자벨 위페르의 이미지를 여전히 서로 견주었다. <피아니스트> 이야기를 꺼내자 반색을 하며 “뉴욕에서 <고양이를 부탁해> 배급한 사람이 줘서 봤어요. 불어에 영어 자막이라 헷갈렸지만, 왜 난 그 영화가 남 얘기 같지 않았지? 내가 그런 건 아닌데, 충분히 공감되고 어디선가 나를 그렇게 가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근데 그 얘긴 왜 물으세요?”

그는 영화배우 윤여정을 자신의 역할모델로 거론하곤 한다. 그의 소망은 분명 좁은 문을 향해 있다. 그걸 버틴다는 건 외로운 일이고 강인함을 필요로 한다. “외로움보다 무뎌지는 게 더 겁나요. 외로워지지 않게 될 수가 없고 배우라는 직업이 이걸 수긍 안 하면 안 되죠. 그리고 누구나 외롭지 않나요?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없다고 느낄 때도 많지만, 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별로 외롭지 않아요.”

자리를 털 무렵이 되자 그는 “홍보는 안 하고 딴 짓만 한 것 같네요. 저는 인터뷰를 홍보보다 내가 했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여기거든요. 그게 더 재밌어요. 근데 배우가 나이 들면 색깔도 변하겠죠? 빛을 더하기도 하지만 변색되는 걸 보는 재미도 있지 않나요? 변화하고 싶어요. 촉박하게 변신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나이 들면 내가 할 수 있는 역이 달라지고 독특함이 생기겠죠.”

배두나는 자신을 강인한 편이라고 했다. 세달 전에 만났던 배두나는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그의 언어는 정확하고 아름다웠으며 자신의 감정과 소신, 자존심과 아픔까지도 균형있게 표현했었다. 오늘의 그는 좀 다르다. “그런가? 아닌가? 이렇지 않을까요? 모르겠다…”라는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평소의 확신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듯도 했다. 그러나 균열없는 청춘이란 미덥지 못하다. 그것을 견디고 끌어갈 힘, 그것은 오늘의 배두나에게서도 여전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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