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풀 3D애니메이션이 밝아지고 화려해졌다. 어둠침침하고 쇳소리가 날 듯한 무채색이 주종을 이뤘던 초창기 작품들(특히 로봇이 나오는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작품 속에서 ‘빛’의 효과를 자유롭게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기술이 높아졌다는 얘기로 풀이할 수 있겠다.
<더 복서>(The Boxer)도 그런 경향을 담고 있다. 남녀 스프링 인형의 권투장면을 코믹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밝은 화면은 물론 입가에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막판 반전 에피소드까지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그 결과는 고무적이다.
인천에 있는 투바애니메이션(대표 안성재·33)의 첫 작품인 <더 복서>는 지난 4월13일 폐막된 제7회 이탈리아 카툰스온더베이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인 혁신상(Special mention for Innovation)을 수상했다. 이 페스티벌에서 한국 작품이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대회의 경우 아시아에서 유일한 수상작이라는 수식어도 받았다. 7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시그래프 2003의 일렉트로닉 시어터 부문에도 선정됐다.
게다가 투바의 또 다른 애니메이션 <벌레>(Worm)도 카툰스온더베이페스티벌에서 비경쟁 부문 상영작에 선정됐다.
“처음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부터 장편보다는 콩트, 특히 앞으로는 모바일용 콘텐츠가 주력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여기에 주력했습니다.”
현지 일정상 폐막식 전에 국내로 돌아와야 했던 안 대표는 자신의 작품이 호명되는 자리에 있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인하대 미술교육학과 출신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 5년 전 회사를 차린 그다. 처음엔 각종 영상물 편집이나 홍보 영상물을 만들면서 제작비를 마련했다. 그리고 2년 전부터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제작에 나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재미있느냐 아니겠어요?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총 15명의 직원 중 관리직 3명을 제외하고 12명이 제작인력이다. 그중 6명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 안 대표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브레인스토밍. 각자 재미있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를 내고 난상토론을 통해 모양을 갖춰나간다.
“이러다보니 재미가 없는 아이디어는 아예 내지 않아요. 재미있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를 더욱 재미있게 가공하다보면 가능성이 점점 보이는 느낌도 들고요.”
그렇게 2년간 3억원을 들여 다진 아이디어가 <더 복서>다. 1분55초짜리 에피소드 4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자. 여자 인형을 가격하기 위해 글러브 낀 팔을 풍차처럼 돌리는 남자 인형. 하지만 힘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 급기야 자신의 머리가 빠져나가는 황당한 사태에 이른다. 그러면서 페이드아웃. 여기서 끝이라면 너무 시시하겠다. 엔딩 타이틀과 경쾌한 음악이 올라가면서 다시 등장한 여자 인형은 남자 인형의 몸통에 용가리 머리, 주사위, 당구공, 토끼 등 다양한 장난감을 끼워 폭소를 유도한다. 마치 NG모음 같은 느낌을 주는 이런 방식은 막판 뒤집기 유머를 구사한 픽사의 초기 작품을 보는 느낌을 준다.
에피소드 하나 더.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여자 인형의 연타에 견디다 못한 남자 인형이 마침내 기권을 선언한다. 흰 수건을 던지고, 신발도 벗은 남자 인형은 필통 속 연필 인형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의 구애는 성공할 수 있을까.
안 대표는 “국내 모바일 콘텐츠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해 국내 대형애니메이션 제작사와 손잡을 계획”이라며 “차기작 <Let’s Fly>도 눈여겨봐달라”고 주문했다. 준비된 그의 행보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궁금하다.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