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랜덜 덕 김(Randall Duk Kim, 59)은 40여년을 무대 위에서 보낸 베테랑 연극배우다. 셰익스피어와 체호프부터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헤머스타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까지 수없이 많은 작품에 출연해왔지만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처럼 브로드웨이 관계자가 아니고는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개봉으로 바뀔 것이다.
오는 5월23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리로디드>에서 김씨는 ‘매트릭스’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진 비중있는 조연, ‘키메이커’를 연기했다. 그는 <…리로디드>를 촬영하며 몇달 동안 함께 촬영했던 동료 배우들에게 크게 감동받았다고 말한다. “사실 키아누 리브스와 로렌스 피시번을 유명인으로만 생각했죠. 하지만 함께 일을 하면서 그런 선입견을 버리게 됐습니다. 리브스나 피시번은 일반 배우의 자세로 촬영에 임했고, 엑스트라들에게도 신경을 써주는 등 자상함을 보여줬어요.”
<…리로디드> 외에도 최근 김에게 또 다른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가 출연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플라워 드럼 송>이 지난 5월12일 토니상 후보작 발표에서 뮤지컬 부문 각색과 안무, 의상 등 3개 부문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3월16일 막을 내린 <플라워 드럼 송>은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한 리바이벌 뮤지컬로 88년 로 토니상을 받았던 희곡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이 각색한 작품이며, <미스 사이공>으로 유명한 리아 살롱가가 주연으로 출연해 화제가 됐다. 김이 맡은 역할은 ‘매스터 왕’. 중국의 전통문화와 미국의 새로운 문화 사이에서 주체성을 상실하는 전 베이징 오페라 단원이다.
김이 연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8살 때다. 한 소극장에서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말콤 역을 맡은 것이 그 계기. 그는 특히 아시아계 배우는 아시안 배역만 연기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고전 작품은 거의 모두 공연했다. 이렇게 연극무대를 고집하던 김이 지난 98년 주윤발 주연의 <리플레이스먼트 킬러>로 영화계에 뒤늦게 데뷔한 것도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였다. 그가 처음 연기생활을 시작했을 때보다 지금은 훨씬 더 재능있는 아시안 아메리칸 배우와 감독, 작가들이 활동 중이지만 그의 생각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시안 아메리칸의 시각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삶을 담을 수 있는 작가는 물론 이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프로듀서, 연출가, 배우 등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플라워 드럼 송> 공연이 끝나는 대로 김은 과거 연극 공연을 했던 친구들과 함께 <리어왕>을 뉴욕 무대에 올리기 위한 준비 중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난 수년간의 리서치를 바탕으로 실크로드를 소재로 한 희곡을 쓸 계획이다. 김의 주요 작품으로는 영화 <로스트 엠파이어> <씬 레드 라인>, 브로드웨이 연극 <골든 차일드>와 뮤지컬 <왕과 나> 등이 있다.뉴욕=양지현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