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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경쾌한 그러나 지독히 앤더슨적인 <펀치 드렁크 러브>

한번 놓치면 영영 따라잡지 못하리라.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할라치면 어느새 영화는 끝나버리고 형형색색의 ‘야한’ 무늬들만이 눈을 어지럽힐 것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는 말 그대로 브레이크가 고장난 레이싱카처럼 질주한다. 고로 이 영화엔 사실 설명 따위는 필요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미친 사랑’ 이야기에 무슨 말을 덧붙일 것인가. 그 속도에 몸을 내맡긴 채 함께 달려가거나 혹은 도중에 뛰어내리면 그만인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앤더슨은 더이상 (대리)아버지와 자식들간의 관계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또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한데 아우르는 장대한 에픽(epic)을 펼쳐 보이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다.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1996)로부터 <부기 나이트>(1997)를 거쳐 <매그놀리아>(1999)에 이르는 동안 앤더슨의 영화를 계속 지켜봐온 사람들에게 <펀치 드렁크 러브>는 매우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지독히 ‘앤더슨적인’ 영화로 생각될 수도 있다. 전작들이 담고 있던 묵직한 주제들을 젊은 감독답지 않은- 그는 1970년생이다- 능수능란한 솜씨로 다루어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끔은 그가 온전히 테크니션으로서의 자질을 맘껏 발산한 영화를 상상해보기도 했었을 테니 말이다.

지나치게 과중한 야심으로 인해 비틀거렸던, 그럼에도 끝내 넘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게 만들었던 <매그놀리아> 이후, 앤더슨이 한결 가볍고 경쾌한 <펀치 드렁크 러브>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가 진정 창작의 리듬을 조절할 줄 아는 감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가치는 일단 이런 점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서 앤더슨은 마틴 스코시즈와 로버트 알트먼의 자장 안에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선배 노장감독들의 대가적인 여유로움을 흘깃거리고 그들의 창작물들을 좀더 자유롭게 인용한다.

인용의 수사학

앤더슨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스코시즈와 알트먼을 따라잡고자 할 때 그들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작품들, 즉 <분노의 주먹>(1980)과 <내쉬빌>(1975) 혹은 <숏 컷>(1993) 같은 영화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펀치 드렁크 러브>는 굳이 비견하자면 <택시 드라이버>(1976)의 트래비스를 <애프터 아워스>(1985)의 공간에 위치시키고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코미디에서 보여지는 터치를 가미한 듯한 영화다. 심지어 그는 <펀치 드렁크 러브>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에서 로버트 알트먼이 만든 가장 ‘후진’ 영화로 꼽힐 만한 <뽀빠이>(1980)를 끌어온다.

폰섹스 한번 시도했다가 악질 패거리에 잘못 걸려든 배리 이건(애덤 샌들러)은 그 일당에게 돈을 뜯긴 뒤, 하와이로 출장 가 있는 레나(에밀리 왓슨)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항공 마일리지를 얻기 위해 헬시 초이스(Healthy Choice)의 푸딩을 잔뜩 사 모으지만 알고 보니 마일리지를 얻기 위해서는 몇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 초조해진 배리는 그냥 공항에 가서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향한다. 레나의 숙소 전화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동생과 전화로 입씨름을 벌이기도 하던 배리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그녀와 통화하는데 성공한다. 레나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순간, 공중전화기 부스 안에는 ‘기적처럼’ 불이 반짝 켜진다. 레나가 묵고 있는 호텔로 향한 배리, 드디어 그녀와 포옹하고 멋들어진 키스! 이때까지 화면 가득 흐르는 노래는 <뽀빠이>에서 올리브 오일(셜리 듀발)이 불렀던 <He Needs Me>.

그런데 어쩌면 이건 너무 서둘러 찾아온 클라이맥스다. 앤더슨은 클라이맥스를 이처럼 앞서 배치함으로써 좀더 커다란 무언가를 기대하는 관객의 심리를 아주 영악하게 조롱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좀 뒤로 미뤄두기로 하자. 그보다는 앤더슨의 인용의 수사학과 사운드 활용이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가를 먼저 살펴보는 편이 낫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보는 이를 설득하기보다는 감응시키려 한다. 그 모든 일들이 그래야만 한다고 믿게 되는 것은 서사의 논리적 구조나 인물의 성격 때문이 아니다. 이때 이 영화의 사운드는 마치 최면술사처럼 관객을 홀리는가 하면, 심장을 직접 가격하는 보이지 않는 망치가 되기도 한다. 혹은 사운드는 애써 불안과 긴장을 감추고 있는 배리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두근거림이거나, 위에 언급한 사례가 보여주듯 멀리서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래이다. 그러니까 배리가 기어이 하와이로 날아가게 되는 것은 순전히 그 노래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노래를 들은 건 우리만이 아니다. 어쩌면 그 노래를 부른 것은 레나이며 배리는 그 노래에 응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의 음악은 디제시스의 안과 밖을 오가는가 하면, 심리적이고 내적인 특성과 물리적이고 외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다는 점에서 묘미를 준다. 게다가 여기서 앤더슨의 인용은 원작에 대한 환기와 무관하게 그 자체 거의 오리지널한 맛을 지니기까지 하고 있다.

그 대단한 영화적 감각에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도입부부터 앤더슨은 한껏 증폭된 사운드 미장센으로 관객의 마음과 귀를 일단 찢어놓고 시작한다. 거의 있음직하지 않은 상황에 우리는 말 그대로 던져진다. 인적이라곤 없는 이른 아침의 도로변.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두고 간 풍금을 지켜보며 의아해하는 것은 배리 이건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다. 배리가 풍금을 집어드는 순간,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난 거대한 컨테이너 차량 한대가 굉음을 내며 우리 눈앞을 가로지른다. 숏이 바뀌면 배리는 어느새 풍금을 가슴에 안고 자신의 사무실을 향해 바삐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낯설고 어리둥절하다는 느낌 자체를 감정이입의 요소로 만드는 건 거의 데이비드 린치를 방불케 할 지경이다.

한껏 증폭된 사운드

특히 ‘매트리스맨’ 딘(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및 폰섹스걸 조지아 패거리에 대한 배리와 레나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이건 영락없는 <광란의 사랑>(1990) 혹은 <블루 벨벳>(1986)처럼 보인다. 해피 길모어, 린치랜드에 떨어지다. 앤더슨은 <펀치 드렁크 러브>가 반쯤은 몽롱한 상태에서 전개되는 한낮의 몽상이자 서둘러 빠져나오고 싶게 만드는 한밤의 악몽이 되기를 바랐던 걸까. 물론 그 악몽은 모조리 행복한 몽상 속으로 녹아들고 말 것이다.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1955)의 패러디, 고개를 가슴에 파묻은 채 주워온 오르간을 쓰다듬고 있는 배리의 오른손에 난 상처는 ‘love’라는 글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오직 사랑만이. <사냥꾼의 밤>의 악당 해리(로버트 미첨)의 왼손에 새겨져 있던 ‘hate’는 여기선 아무런 의미도 없다.

두 연인간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펀치 드렁크 러브>는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쉼없이 달려간다. 이건 누가 뭐래도 진짜 로맨틱코미디다. 앤더슨의 전작들에 등장한 아버지(들)가 부재한 자리에는 지극히 수다스러운 7명의 누이들이 놓여져 배리의 신경을 건드릴 뿐이다. 한없이 가벼운 공기로 빚어진 듯한 <펀치 드렁크 러브>를 두고, 앤더슨이 비로소 애늙은이같은 태도는 걷어치우고 나이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은 사랑을 믿었던가. 물론. 문제는 배리 이건 역을 맡은 애덤 샌들러가 앤더슨이 몰고 가는 사랑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데 있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온전히 앤더슨의 스타일을 통해서만 드러나며, 이 속도전의 세계에서 배리는 언제나 뒤처져 힘겹게 따라온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의 표현은 속도가 아닌 강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흡사 애덤 샌들러를 위해 일부러 마련해놓은 듯한 다음과 같은 대사를 보라. “난 당신 얼굴을 해머로 뭉개버리고 싶을 만큼 당신을 엄청 사랑해.” 뒤따르는 레나의 응답은 더욱 가관이다. “난 당신 눈알을 빼내 씹고 빨아먹고 싶을 만큼 당신을 엄청 사랑해.” 레나와 함께 타고 가던 자동차를 들이받은 ‘매트리스맨’ 똘마니들에 대한 배리의 즉각적인 보복장면 역시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음악과 사운드는 폐쇄적인 배리를 그의 사무실과 방으로부터 꺼내어 달리도록 만들고 싶은 앤더슨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보는 이들의 감정을, 배리의 마음을 앞서서 언제나 저만치 먼저 달려간다. 즉 그것은 미래를 앞서 ‘들려주는’ 내레이션이다. 하지만 굳이 애써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행여라도 놓칠세라 앤더슨은 충분히 강도 높게, 충분히 오래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의 단출한 미장센 또한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매그놀리아>에서보다도 더욱 커다란 앤더슨의 야심을 본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스타일은 사려깊다기보다는 영악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재능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배리가 ‘예기치 않게’ 서둘러 달리는 것은 한번뿐이다. 기어이 유타주 프로보에 위치한 ‘매트리스맨’ 딘의 가게를 찾아간 배리, 그런 그가 딘에게 원하는 것은 고작 “이젠 다 끝났어”라는 한마디다. 앤더슨은 관객이 충분히 예측가능한 순간에 클라이맥스를 배치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약간 속은 듯한 느낌이 들더라도 그 또한 관습적인 영화적 서사를 솜씨있게 피해나가고 있는 걸로 봐두면 족하다. 역시 아주 영악하게.

사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오로지 스타일의 영화다. 배리-애덤 샌들러의 사랑 이야기는 그저 관객의 눈을 붙들기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딱 한번으로 족하다. 영악함이 가신, 앤더슨의 진심이 온전히 펼쳐진 그의 첫 번째 영화를, 나는 보고 싶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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