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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가버린 상처투성이 미소년 장국영

아시아 관객, 아니 전세계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미소년의 미소가 저문 1일, 장궈룽(장국영·레슬리 청)의 팬사이트 등엔 추모의 글이 끊이지 않았다. “전설이여, 영원히”

어찌도 이리 영화처럼 갔는지. 영화 <패왕별희>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 앞에서 칼을 들고 춤추다 자결했던 우미인처럼, 그는 1일 오후 홍콩섬 센트럴에 있는 만다린오리엔탈 호텔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자신의 삶에 이별을 고했다. 올해 46살.

* 대만 일간지 장국영 유서내용 발표 -

2일 홍콩·대만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애정관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동성애자인 장궈룽은 18년 가까이 사귀어왔던 연인 외에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돼 갈등을 빚었다고 알려져왔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건강악화와 사업비관 등의 이유를 대는가 하면 2001년 <이도공간>에서 귀신을 보게 되는 정신과의사역을 맡으며 그가 급격히 예민해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가 길에 쓰러진 채 발견된 1일 오후 7시께(홍콩시각)부터 홍콩의 온 언론은 온갖 추측보도를 쏟아내며 방송을 진행했고 2일자 홍콩뿐 아니라 중국, 대만 등의 언론은 그의 기사로 도배하며 팬들의 슬픔을 전했다.

<베이징 청년보> <베이징 천바오> 등 중국 언론들은 1면에 ‘장궈룽 투신 자살’이란 기사와 함께 문화면 한면씩을 털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베이징 청년보>는 ‘장궈룽-인생종점, 패왕별희 재연’ ‘궈룽, 궈룽, 어찌 이럴 수가’라는 제목 아래 추모사와 함께 <패왕별희> 등 영화와 공연장면을 담은 사진 등을 실었다. 장의 팬사이트에는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등의 조문이 빗발쳤으며, 그가 투신한 호텔과 영안실에는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장궈룽은 1956년 홍콩의 부유한 양복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할리우드 스타 윌리엄 홀든의 전속 재단사였다. 하지만 어린시절 부모의 이혼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영국에서 대학을 나온 뒤 1977년 홍콩의 한 아시아가요제로 입상하며 가요계에 먼저 데뷔한 그는, 1979년 <열화청춘>으로 영화배우가 되었다. 장궈룽의 맑은 얼굴이 각인된 건 우위썬 감독의 <영웅본색>. 이후 배우로서, 가수로서 그는 가장 널리 알려진 중국어권 스타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가 칸 국제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아비정전>의 거울 앞에서 맘보춤을 추던 남자, <성월동화>의 거칠고 고독한 눈빛, <해피 투게더>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던 슬픈 얼굴, <패왕별희>에서 두꺼운 분도 감출 수 없었던 처연한 표정…. 오십 가까운 나이가 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수많은 관객들의 연인이었다. 이제 장궈룽은 그 기억 속에만 또렷이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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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하성봉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