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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울려펴진 반전
2003-03-25

아카데미의 '반란'‥예상깨고 중반부터 술렁

◇2003년 시상식 풍경

“<시카고>와 마이클 무어가 오스카에 불을 지피다.”

<버라이어티>가 아카데미 시상식 도중 보도한 기사의 제목처럼, 70년대 제인 폰다가 베트남전 반대운동을 격렬하게 벌인 이래,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가장 큰 반전과 평화의 기원으로 달궈진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바로 전날(22일) 로스앤젤레스의 샌터모니카 해변에서 열린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선 “이 전쟁이 제국주의와 석유를 위한 것”이라든가 “좀더 ‘스피릿’을 쏟아 올해엔 부시를 사무실에서 몰아내자”는 영화인들의 수상소감이 쏟아졌었다. 그에 비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과격한’ 발언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됐었다. 하지만 <볼링 포 컬럼바인>의 감독 마이클 무어는 예상외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거머쥐며 얌전하던 아카데미 무대를 뒤엎어버렸다. 무어는 <볼링…>에서 99년 있었던 미국 콜럼바인 고교 총격 사건을 통해 총기가 난무하는 미국의 일그러진 초상을 그려냈고, 부시를 비롯한 우익세력을 <멍청한 백인들>이란 책에서 정면으로 비판했던 인물. 그는 시상자인 다이언 레인의 환호와 이례적인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고 다른 다큐멘터리 후보들과 함께 올라섰다. “우리가 함께 연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올라왔다”며 “우리는 실재의 세계가 좋아 다큐멘터리를 만들지만, 지금의 세계는 허구같다”로 시작한 그의 발언이 부시에 대한 맹공으로 나가자, 시상식장은 야유와 환호가 엇갈리며 웅성거렸다.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보수적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국의 대통령을 공격한 그의 발언은, 두고두고 미국내 논쟁거리가 될 것 같다.

△ 제75회 아카데미영화제에 참가한 많은 영화인들은 평화를 표시하는 브이자를 그리며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사진은 배우 앤디 세르키스, 수잔 새런든.

행사취소 소문까지 나돌던 아카데미 시상식은 레드카펫 행사를 비공개로 간단히 치르고, 시간과 규모를 축소시켜 진행됐다. 실제 엄격하게 지켜진 45초의 연설시간 때문에, 연설 도중 음악이 연주되고 마이크가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팀 로빈스-수잔 새런든 부부는 행사장에 입장하며 평화의 사인을 그려보였고, 많은 참석자들이 평화를 기원하는 뱃지를 달아 소극적이나마 그들의 평화의 의지를 내보였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에드리언 브로디는 긴 소감 끝에 “1초만, 1초만”을 호소한 뒤 “나는 상을 받고 있지만 정말 이상한 시대다. 이 영화를 만들며 전쟁이 가져오는 슬픔과 비인간적인 면이 얼마나 심각한지 절실히 깨닫게 됐다”며 파병된 친구가 돌아오길 빌었다. 여우주연상의 니콜 키드먼도 자신의 어머니와 자식 이야기를 하며 “지금 많은 부모들이 전쟁 때문에 자식을 잃고 있다”고 전쟁의 비극을 상기시켰다. 멕시코의 혁명적 화가 프리다의 삶을 그린 <프리다>의 주제가를 소개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이투 마마>의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프리다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반전의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라고 말해 사람들의 환호를 끌어냈다.

사실 보수적인 아카데미 위원회는 “20세기에도 전쟁의 바람에 숨기보다 자신을 전쟁의 분위기에 적응시켜왔다”(<엘에이 타임스>)고 평가됐다. 하지만 명분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그 언제보다 높은 올해, 아카데미 위원회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45초의 시간만 제한될 뿐, 수상자들의 발언에 어떤 가이드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결국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막지 못했고, 세계인은 이 순간을 똑똑히 지켜보게 됐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부문별 수상자ㆍ작품

△ 감독상 폴란스키,작품상 리처드,남우주연상 브로디,여우주연상 키드먼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작품상=<시카고> ▲감독상=로만 폴란스키(<피아니스트>) ▲남우주연상= 애드리언 브로디(<〃>) ▲여우주연상= 니콜 키드먼(<디 아워스>) ▲남우조연상= 크리스 쿠퍼(<어댑테이션>) ▲여우조연상= 캐서린 제타-존스(<시카고>) ▲각색상= 론 하우드(<피아니스트>) ▲각본상= 페드로 알모도바르(<그녀에게>) ▲촬영상= 콘래드 W. 홀(<로드 투 퍼디션>) ▲편집상= 마틴 월쉬(<시카고>) ▲장편 애니메이션상=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단편 애니메이션상= <춥춥스> ▲미술감독상= 존 마이어 등(<시카고>) ▲음향상= 마이클 밍클러 등(<〃>) ▲음향편집상= 마이클 홉킨스 등(<반지의 제왕:두개의 탑>) ▲시각효과상= 짐 라이젤 등(<〃>) ▲의상상= 콜린 앳우드(<시카고>) ▲분장상= 존 잭슨 등(<프리다>) ▲작곡상= 엘리엇 골든탈(<프리다>) ▲주제가상= 에미넴 등(의 ‘루스 유어셀프’) ▲장편 다큐멘터리상= <볼링 포 컬럼바인> ▲단편 다큐멘터리상= <트윈 타워스> ▲외국어영화상= <노 웨어 인 아프리카>(독일) ▲단편영화상= <디스 차밍 맨> ▲공로상= 피터 오툴

특정작품 독주없이 골고루 수상

다른 어느 해보다 작품성이 쟁쟁한 작품들이 후보에 많이 올랐던 올 아카데미에선, 특정 작품의 독주없이 골고루 상을 나눠가졌다. 이 가운데에는 기대 이상으로 선전한 작품도 있었고, 아쉬움을 남긴 작품도 있었다.

<갱스 오브 뉴욕>의 부진과 <피아니스트>의 선전

아카데미와 마틴 스코시즈 감독는 언제쯤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 <성난 황소>(1980)와 <좋은 친구들>(1990)에 이어 다시 오스카 감독상에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아카데미는 그를 호명하지 않았다. 마틴 스코시즈 개인 뿐 아니라 <갱스 오브 뉴욕>에 이번 아카데미는 재난이었다. <시카고>, <디 아워스>와 함께 가장 많은 주요 부문의 수상이 점쳐졌지만 단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다.

반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각본상 등 주요 부문 가운데 3개를 석권해 전체 후보작 가운데 가장 실속있는 장사를 했다. 특히 잭 니콜슨, 다니엘 데이 루이스 등 노련한 배우들의 경쟁에 가렸던 에이드리안 브로디의 남우주연상 수상은 예상 밖의 결과였다. 미성년자 추행사건으로 미국을 떠났던 로만 폴란스키의 감독상 수상 역시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점쳐졌었다.

에미넴, 미야자키 하야오 ‘이변’

이번 아카데미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피터 오툴은 “지금까지는 늘 수상자의 들러리만 섰는데 이제야 나도 받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50년 세월의 서러움을 고백했다. 오툴은 50여 작품에 출연하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만 7번이나 올랐지만 단 한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장편애니메이션 부문 수상과 함께 의 에미넴이 주제가상을 수상한 것도 이날의 이변 가운데 하나였다. 에미넴은 시상식의 전통인 주제가상 후보들의 축하공연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본래 시상식에 참가할 생각도 있었으나 그의 돌발행동을 우려한 아카데미 조직위에서 “축하공연에서 본래의 노랫말을 바꿔서 부르지 말라”는 주문을 해와 에미넴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는 후문.

이날 무대에는 ‘아카데미 가족사진’이 연출되기도 했다. 줄리 앤드류스,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지난해 수상한 할리 베리까지 역대 수상배우 66명이 나란히 앉아 포즈를 취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