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의 힘에 크게 기대고 있는 로드무비 <어바웃 슈미트>는 소설 원작이 따로 있는데, 요즘 방식으로 각색을 거쳤다. 스토리를 많이 바꾸는 건 물론이고, 대사를 그대로 옮겨오는 경우도 드물다. 지난 뉴욕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알렉산터 페인의 이 영화는 이것은 아주 인상적일 만큼 황량한 느낌의 코미디로서, 곳곳에 사회에 대한 풍자를 얽어넣고 있다. 페인의 전작들인 <시티즌 루스>와 <일렉션>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고향인 네브래스카의 밋밋한 일상을 배경으로 삼은 인물탐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위해 페인은 우선 작품의 무대를 옮겨왔다. 그리고는 루이스 베글리의 96년작인 원작소설의 기본 상황에서 뼈대(예순몇살쯤 된 주인공이 은퇴를 강제당하는데 그의 아내가 죽고 자식은 맘에 안 드는 사내와 결혼하려 들고)만 겨우 남겨둔 채, 감독은 기본재료를 가지고 대단한 변형을 시도한다.
베글리의 슈미트는 하버드 출신의 뉴욕 변호사로서 도시적이고 부유했던 데 반해 잭 니콜슨이 마치 이게 자신의 유작이라도 될 것인 양 맡아 열연하는 페인의 슈미트는 외톨이이며 오마하의 보험이사다. 슈미트의 딸 지니(호프 데이비스)는 지루한 광고회사 중역이 아니라 초라한 말단직원이며, 약혼자 랜달(더모트 멀로니) 역시 유대인 정신과 의사 아들이 아니라 물침대 세일즈맨일 따름이다. 원작의 반(反)유대주의 분위기도 여기서는 좀더 분방하고 편협한 염세주의로 변형되었다.
은퇴기념파티는 이 영화의 가장 슬프게 웃긴 장면 중 하나다. 앞길은 전혀 황금빛 석양을 약속해주지 못한다. 슈미트는 커다란 말 한 마리를 사서, 언젠가부터 너무나 싫어진, 초라하고 단정치 못한 아내 헬렌과 함께 여행을 떠날 맘을 먹는다.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가치가 뭘까 하고 게으르게 생각을 뒤척이다가, 매달 22달러를 탄자니아 한 어린이 후견인으로서 기부하기로 갑작스레 결정내려 버린다. 여섯살 먹은 엔두구에게 보내는 편지들은 유용한 내러티브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슈미트의 온통 부패해버린 레이건식 양심에도 목소리를 부여한다. 바보스런 자부심과 기계적인 낙천주의와 상냥한 경멸 등등이 걸쭉하게 섞인 그런 톤 말이다. 그러다가 헬렌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슈미트는 딸 지니에게 자신을 좀 돌봐달라고 씨도 안 먹힐 부탁을 하다가 거절당한다. 랜달로부터 “헬렌은 아주 특별한 여인이셨습니다”라는 평을 듣자 기분은 더 가라앉아버린다. “화를 내도 좋습니다” 장례식에서 목사는 슈미트를 위로한다. “신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화를 낸다 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으십니다.”
두주쯤 지나고 나니 슈미트의 집은 돼지우리보다 더 엉망이고, 그는 인생에서 일말의 진실을 발견해보고자, 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난 지니는 아버지가 일찍 도착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여행길에 만난 그의 어린 시절 집은 이제 타이어 가게다. 슈미트가 트레일러 공원에서 저지르는 황당한 실수와 헬렌의 영혼과 대화를 나눠보려는 우스꽝스러운 노력은,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사람들과의 만남을 끊고 지내왔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들이며, 그의 고립과 괴팍함은 마침내 덴버에 도착해 랜달의 어머니 로버타(캐시 베이츠)를 만나는 순간 온전히 드러난다. <시티즌 루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페인은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들을 드라마로 만드는 데 능숙하다. 구식 사고와 신식 사고의 충돌과 갈등 말이다. 로버타의 거친 사이코 수다를 해석해 듣고, 또 가족들간의 얽힌 끈을 더욱 얽어놓고,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물침대와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뜨거운 물에 몸 담그고 목욕도 한판 하고, 이 안사돈의 성생활에 대해 알고 싶은 것보다 훨씬 많이 알게 된다. 비로소 애마 곁으로 돌려보내질 때까지 슈미트의 사돈댁 방문 첫날밤 일과는 소란스럽기만 하다.
슈미트의 여정을 연기하는 내내, 니콜슨은 여전히 냉소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지금까지 다른 작품들에서와 비교해본다면, 대단히 부드러운 냉소다. 완고함, 고립, 두려움에서 비롯된 작고 단단한 그 미소 말이다. 이 스타가 캐릭터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드러냄에 따라, 혹은 관객들이 그 캐릭터에 니콜슨이라느 스타의 이미지를 함께 받아들임에 따라, 이 영화는 감상주의로부터 멀어진다. 슈미트의 대책없는 독백은, 그가 떠돌다 만나는 산책로와 체인 레스토랑과 역사 유적들에 정말 멋진 파토스와 함께 스며든다.
페인은 수사(修辭)가 뛰어난 감독이다.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어바웃 슈미트>는 ,경박함을 신념삼아 살고 생각이라곤 없으면서 진부한 인간들의 구어체로 그려지고 서술된다. 하지만 여기서, 인물 묘사는 전작들에 비해 좀더 절제돼 있다. 고독한 그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관객은, 이것이 실은 얼마나 슬픈 영화였던지 알게 될 것이다. 페인은 사람들에게 격려가 됨직한 엔딩을 거부하고, 아주 절묘한 솜씨로, 눈을 저 멀리 돌려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