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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프랑스영화
2001-01-05

영화읽기/프랑스영화

영화읽기/ 프랑스영화 이야기

제목:

부제: 장 르누아르 (2)

발문:

발문:

임재철/ 영화평론가·<필름 컬쳐> 주간

중년의 회사원인 모리스 르그랑(미셀 시몽)은 집에서는 공처가이고 회사에서는 무능한데다 별로 특징도 없는 인물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일요일에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다. 거리에서 만난 룰루라는 젊은 여인에게 끌리면서 열정의 노예가 된 그는 자신의 사회적 배경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르고 만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의 죄를 룰루의 포주이자 연인인 데데가 짊어지게 되고 르그랑은 대신에 부르주아적 삶에서 벗어나 거리의 부랑자가 된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르누아르의 <암캐>는 스트로하임, 더 나아가서는 에밀 졸라에게 원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현실의 냉혹한 관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회적으로 선과 악이라는 구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세히 관찰했을 때 우리의 흥미를 끌지 않는 인물은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그는 주연격인 세명의 인물들을 끈기있게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룰루를 이용해 르그랑으로부터 돈을 뺏어낸, 통상적으로는 악당이라 보아도 무방한 데데가 르그랑 대신 살인 누명을 썼을 때 우리는 그에게도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제:

르누아르의 사실상 최초의 발성영화인 <암캐>는 개봉 당시 무엇보다도 그 사운드 사용의 참신함으로 주목받았다. 파리의 거리에서 현장음을 그대로 녹음해 사용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당시의 관객에게는 거의 충격적이라 할 만큼 신선하게 비쳤던 것이다. 절친한 친구인 피에르 브롱베르제가 제작을 맡음에 따라 제작에 있어 완벽한 자유를 누리면서 영화를 찍었던 르누아르 자신도 사운드 사용에 대해 상당히 흥분했던 것 같다. “배우들이 말하기 시작하자 나는 인물의 진실에 다가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발성영화를 만들면서 정말로 나를 사로잡는 것은 인물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인물들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말을 통해 아주 다양한 것들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감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리얼한 사운드 사용 외에도 이 영화는 나중의 르누아르를 예견케 하는 많은 요소들을 담고 있다. 우선 그 특이한 프롤로그를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두명의 인형들이 등장해 작품을 소개하는데 한명은 이 영화는 “악은 징벌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심각한 사회 드라마이다”고 말하고 다른 한명은 이 영화가 “매너의 코미디로서 도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세 번째 인형이 등장해 관객에게 이들이 하는 말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면서 이 영화는 “코미디도 드라마도 아니며 어떠한 도덕도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정말로 이 영화는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는 대단히 ‘차가운’ 영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냉정함으로 인해 지금 보아도 별로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작품이 된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앞서 본 대로 영화의 앞부분과 끝에 연극 무대를 등장시켜 이것을 일종의 프레이밍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르누아르 영화의 연극성 혹은 허구성이란 주제는 주로 이러한 프레이밍 장치를 통해 얻어지고 있는 것으로 그의 감독으로서의 전 경력에 걸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것을 우선은 관객에게 비판적인 거리감을 획득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구성하는 장치를 드러내는 것이 모두 이러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라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해 보인다. 특히 전후의 르누아르 작품들이 동시대적 사회적 맥락에서 점차 이탈하는 현상을 보일 때 이러한 설명은 확실히 궁색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도대체 르누아르가 이러한 연극성을 강화하는 장치들을 도입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좀더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어떠한 예술도 현실을 그 자체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항상 현실의 재구성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어떤 틀 속에 담아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어떠한 예술도 프레이밍의 장치가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경우를 본다면 존 포드가 보여주는 광활한 모뉴먼트 밸리의 화면도 그 엄청난 박진감에 불구하고 사실은 엄밀한 기획과 의도하에 포획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예술도 그 근본에 있어서 허구성 혹은 작위성을 가지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러한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가 아니면 감추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르누아르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식화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주 초기작부터 연극적인 장치들을 서슴없이 전면에 드러내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반된다고 할 수 있는 지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마도 르누아르의 영화를 그만큼 복합적인 것으로 만들어준 동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르누아르가 세 번째 발성영화인 <물에서 살아난 부뒤>는 바로 그러한 복합적인 지향이 잘 드러난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부랑자인 부뒤(미셀 시몽)가 길거리를 방황하는 것을 서점 주인인 레스팅그와가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부뒤의 부랑자로서는 거의 완벽한 용모(?)에 깊은 인상을 받은 레스팅그와는 이윽고 그가 센강에 투신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양식있는 부르주아’인 그로서는 그저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는 강에 뛰어들어 이 부랑자를 구해낸다. 그리하여 레스팅그아는 졸지에 용감한 시민이 되고 부뒤는 그의 집에서 부랑자에서 벗어나 교양있는 시민으로서 거듭 나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된다. 부뒤는 틀에 얽매이는 것을 혐오하는 인물이지만 이 사실은 극히 위선적이고 억압적인 부르주아 가정에서 점차 순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에는 하녀인 루이즈와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르누아르의 30년대 영화를 통틀어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만한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뱃놀이를 하던 와중에 부뒤가 강 위에 떠 있는 꽃을 주으려하다가 보트가 뒤집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떠오르지 않자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부뒤가 하류로 내려가는 것을 보여준다. 더이상 인적이 없는 곳까지 왔다는 것을 확인하자 부뒤가 물 위로 떠오른다. 뭍에 오른 그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결혼식 예복을 벗어던지고 근처의 허수아비가 걸치고 있던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리고 피크닉 나온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얻은 다음 들판에 벌렁 드러눕는다. 그 순간 카메라는 부뒤의 시선을 따라 강 유역을 360도로 천천히 회전한다. 이 장면은 레스팅그아의 집에 머물면서 좁아졌던 부뒤의 시계가 갑자기 넓어졌었음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숨막힐 듯한 부르주아적 환경에서 이제야 부뒤는 다시 마음대로 대기를 호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해방감이 카메라의 극히 작위적인 움직임에 의해 얻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앞부분 레스팅그아 집에서의 다소 폐쇄적인 화면구도와의 대비에 의해 이 장면의 개방감은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연 풍경의 광활함도 결국에는 프레이밍의 적절한 활용에 의해서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르누아르는 이러한 양자간의 역학에 대단히 예민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중제:

1930년대 르누아르는 확실히 형식적인 구조에 별로 개념하지 않는 감독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을 그 원래의 형태대로 포착하는 것이지 그것을 변형하거나 가공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시기 상당수의 영화들이 이미 지난호에 본 대로 즉흥적인 결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많다는 것이 이것을 잘 입증해주고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 망명해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다음부터, 더 정확히는 <강>을 만드는 시기부터 확실히 그는 양식화에의 의지가 좀더 강해지고 있다. 이어서 만들어진 세 작품 <황금마차>(1952), <프렌치 캉캉>(1955), <엘레나와 그 남자들>(1956)은 완전히 연극 혹은 연예계를 무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연극 삼부작’이라 이름붙여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 영화들에서는 연극적인 공간이 거의 완전히 현실을 잠식하고 있어서 연극이 곧 현실인 지점에까지 도달한다. 이 영화들은 어느 것이나 상상된 과거를 배경으로 갖고 있으며 또 여주인공이 연극이냐 삶이냐는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게 묶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황금마차>는 18세기를 배경으로 이탈리아의 연극단이 페루의 어느 도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극단의 여성 스타인 카밀라는 금방 이 도시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 그리하여 세 남자로부터 구애를 받는다. 그녀와 같은 연극단에 속해 있는 펠리페는 좀더 단순하고 안락한 삶을 약속해준다. 유명 투우사인 라몬은 좀더 열정적이고 화려한 삶을 약속해준다. 그리고 총독은 그녀에게 부와 지위를 약속해준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카밀라는 권력의 상징인 황금마차를 선뜻 선사한 총독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황금마차를 교회에 기증함으로써 누구를 연인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선택 자체를 회피해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연극배우로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터 욕망의 대상이었던 황금마차를 포기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사랑을 포기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서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굳이 다른 사랑을 필요하지 않은 단계에 이른 것이다. 무대 위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체험을 통해서 그녀는 관객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그녀에게 부여된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무대의 정중앙에 홀로 서있는 카밀라를 보여준다. 극단장은 그녀에게 묻는다. 그들(카밀라의 구애자들)이 그립지 않은가 라고. 그녀는 “약간”이라고 대답한다. 그녀라고 내밀한 연정이 그립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창작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이처럼 감동적으로 묘파한 장면도 드물 것이다. 어쨌든 ‘연극 삼부작’을 통해 르누아르는 연기하는 것 다시 말하면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일인 것인가 하는 그 자신이 오랜 기간에 걸친 탐구가 이끌어낸 해답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할 것이다. 톰 밀른의 말을 약간 바꾸어 표현하자면 르누아르는 현실(삶)에서 예술을 만들어내는 경지에서 예술에서 현실(삶)을 만들어내는 경지로 이행한 것이다.

중제:

르누아르처럼 오랜 시기에 걸쳐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당연히 어떤 시기가 그의 전성기인가 하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경우는 크게 전전과 전후, 그리고 좀더 좁혀서는 30년대와 50년대 중 어느 시기가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낸 시기인가를 놓고 논의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유명한 작품들이 나온 시기가 전성기라고 볼 수있다는 다소 상식적인 논의대로 30년대를 그의 ‘황금시대’로 꼽는 것이 아직은 일반적이다. <암캐>에서 <물에서 살아난 부뒤>, <랑쥬씨의 범죄>를 거쳐 <위대한 환상>, <게임의 규칙>에 이르는 시기는 확실히 프랑스영화사 그리고 세계영화사를 통틀어도 비견할 만한 작가를 찾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그가 놀라운 영화들을 연달아 쏟아내던 시기였던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당시 그가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러한 평가를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는 인민전선 내각 및 프랑스 공산당에 대해 아주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하지만 50년대의 르누아르도 30년대의 그것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상당히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프렌치 캉캉>의 그 지극히 인공적인 세트를 떠올려보라) 무엇보다도 영화 만들기에 대해 대단히 원숙한 사고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누아르에게 접근하는 생산적인 방법 중 하나는 유명한 <게임의 규칙>, <위대한 환상>에 바로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기작들에서 드러나는 테마들을 보고 그것들을 다시 전기작들에서 소급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작가로서의 그의 고유성이 좀더 명확히 부각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30년대의 작품들 중 가장 정치적인 의식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꼽히는 <랑쥬씨의 범죄> 같은 영화를 ‘허구의 힘’이란 관점에서 다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악덕 기업주가 운영하던 출판사를 그가 죽은 뒤 펄프 소설가인 에메데 랑쥬를 중심으로 직원들이 똘똘 뭉쳐 협동조합 체제로 운영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거의 ‘노동자들의 천국’이 그려지게 되는데 죽은 줄 알았던 사장 바탈라가 되돌아오면서 문제가 생기게 되고 랑쥬는 엉겁결에 그를 죽이고 만다. 랑쥬는 애인인 발렌틴과 외국으로 도피하려 하면서 허름한 술집에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의사(擬似) 배심원’이 된 술집의 손님들은 그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이 커플이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해준다. 확실히 이 영화에서 노동자 및 하층계급 사람들의 단결은 우리를 감동케 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이 영화에서 매력적인 부분은 랑쥬의 몽상가적인 측면이 아닐까. 그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 외에는 별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과연 노동자들이 이끌고 힘있는 공동체를 만들어냈을 것인지는 사실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다소 억지를 부리자면 <랑쥬씨의 범죄> 자체가 그의 몽상의 산물일지도 모를 노릇이다. 가본 적도 없는 미국 서부에 대한 그의 몽상이 영화 속의 소설 <아리조나 짐>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하긴 그렇게 보면 <암캐>에서의 르그랑의 유일한 낙이 그림그리기라는 것도 그냥 보아 넘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랑쥬가 이야기하기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인 것처럼 르그랑도 그림그리기를 통해서만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랑쥬와 르그랑은 아마추어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높은 가격에 팔리게 되지만 그들은 그런 성공에 별로 연연해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결국 르누아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예술가란 후대의 명성이나 경제적 성공 따위가 아니라 창작 과정 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희열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희열만큼 우리에게 ‘존재의 확신’을 확실하게 부여해주는 것도 달리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고다르가 <엘레나와 그 남자들>에 대해 쓴 글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은 다소 실존주의적 과장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놀랄 만큼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죽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