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수도사인 크리스티앙(파트릭 델솔라)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과거 살인사건에 연루됐다는 죄책감이 그를 옥죄는 것이다. 수도원장은 고해와 동시에 죄가 사해졌다고 위로하지만, 그는 13년 전 자신의 일행들에 의해 무고한 부부와 그들의 딸이 죽임을 당했다는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자신의 총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크리스티앙의 밀고로 종신형을 살게 된 마르커스 일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러나 도주 중에 차가 고장을 일으키고, 결국 이들은 크리스티앙이 은둔해온 근처 수도원에 침입한다.
■ Review
‘프렌치 액션 블록버스터’라는 홍보 카피는, 잘라 말하면 ‘사기’다.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시원스런 액션장면을 기대했다간 오산이다. 정작 영화는 도입부부터 원치 않은 살인사건에 휘말린 적 있는 한 인물의 내면 갈등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피로 얼룩진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망각이라는 이름의 인슐린을 투여할 것인가 아니면 재산을 강탈하는 것만으론 모자라 끝내 딸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살해한 무자비한 옛 동료들을 응징할 것인가.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크리스티앙의 자책은 연이어 계속된다. 복수극으로서의 <레퀴엠>은 제법 설득력 있다. “마르커스 일당이 수도원을 찾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들을 수도원으로 불러들였다”는 전제는 구미를 자극한다.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수도원에서 크리스티앙과 마르커스 일당이 벌이는 싸움을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구도에 비하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수도원장과 길을 잃어 하룻밤 수도원 신세를 지게 된 여자와 함께 마르커스 일당한테 인질로 잡힌 크리스티앙은 적의 약점을 이용해서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엿보게 되는데, 중반까지 전해지는 긴장감은 팽팽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스릴러라는 외투를 걸친 장르영화로 놓고 보면, <레퀴엠>은 후반으로 갈수록 합격점을 받기 어렵다. 마르커스 일당을 몰살시키려는 함정을 파놓은 이가 누구인지 알아맞히는 일은 암산만으로도 답을 구할 수 있는 이차방정식 수준을 넘지 않는다. 덧붙여 몇몇 세부 설정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례로 마르커스 일당은 크리스티앙이 정체를 밝힐 때까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과거 “서로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비밀결사단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게 영화 속 해명. 그렇다면 크리스티앙은 13년 전, 어떻게 경찰에 사라진 이들의 신원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의식을 잃기 직전에.
메가폰을 잡은 에르베 르노는 1990년대 중반까지 <엠마뉴엘> 시리즈 제작에 참여한 적 있는 신인감독. 배우들 또한 한국 관객에겐 낯선 이들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 <시트콤> 등을 만들었던 올리비에 델보스크와 마르크 미소니에가 제작자로 나섰다는 점이 눈에 띈다. 스페인 시체스영화제 등에서 선보인 뒤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개봉했지만 화려한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이영진 ant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