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뭡니까 다시 만들어와요!”
호통치는 부장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진다. 오늘 첫출근한 가냘픈 체구의 신입사원은 그저 머리를 조아린 채, 자신이 오전 내내 정성들여 작성한 문서가 가차없이 찢겨져 휴지통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당황한다. 부장은 일본인이고 신입사원은 파란 눈의 서양인이라는 점만 빼면 우리에겐 너무나 낯익은 광경인데도 객석의 프랑스인들에게선 폭소가 터져나온다. 지난 주 각종 매체의 주목을 받으며 개봉된 프랑스 영화 <놀라움과 떨림>(Stupeur et Tremblement)의 첫 장면이다.
<놀라움과 떨림>은 <세상의 모든 아침> (1991)으로 잘 알려진 알랭 코르노 감독의 신작으로, 벨기에 출신의 젊은 여성 아멜리가 일본의 한 기업에 취직해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아멜리 노통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92년에 펴내 베스트셀러가 된 동명의 자전적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주인공 아멜리 역의 여배우 실비 테스튀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일본인이며 대화도 모두 일본어로 표현되는 독특한 프랑스 영화다.
일본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던 아멜리는 부푼 희망을 안고 첫 출근길에 오른다. 그녀는 일본의 언어와 문화를 거의 완벽하게 습득한 편이지만, 일본인 상사의 지나친 권위주의나 복종만을 강요하는 문화를 막상 몸으로 접하게 되면서 겪는 문화적 충돌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세다. 사소한 행동조차 ‘여긴 서양과 달라, 너의 행동은 여기서 통하지 않아’라며 원천적으로 거부되고 비난받는다. 지시받지 않은 일을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행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처벌을 받고, 자신의 전공업무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커피 주전자와 복사기 사이를 맴돌며 분주한 날들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사무실에서 쫓겨나 화장실로 근무지가 옮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일본 사회에 착륙한 의욕적인 서양 아가씨가 앞으로 맛보게 될 ‘놀라움과 떨림’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과 서구 두 문화의 갈등으로 인해 일본인 집단에서 수모를 겪는 서양인이라는 모티브는 데이빗 보위가 출연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의 또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영국군인은 ‘명예롭게 할복하지 않은 비굴한 겁쟁이’ 취급을 하는 일본 장교에게 온갖 모욕을 당한다. <놀라움과 떨림>은 아멜리가 일본 기업에서 겪는 좌충우돌을 조금 과장해 적당한 유머를 입혔고, 분노 대신 마조히즘에 가까운 인내로 귀결된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타문화권에 진입하려는 외국인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는 문화적 충돌 이상의 것이 있다. 버젓한 자기 나라에서 이보다 더한 고단함을 겪기도 하니 혼자 화장실에서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아멜리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회사원의 초상’이 아닐까.
극장에 불이 켜지자 출구로 향하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동양인 관객에게로 향한다. 마치 아멜리가 자신을 괴롭히던 상사를 넌지시 일별할 때와 비슷한 눈길이다. 그중 어느 중년여성이“영화 재밌게 봤어요” 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저는 일본인이 아니예요”라고 한마디 하려다 그냥 웃고 만다. 처음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가 권위주의에 부딪쳐 넘어지고 깨지는 고군분투기는 나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일본이든 한국이든, 혹은 아멜리의 나라든 이 세상 모든 회사의 아침은 다 그렇게 시작되는 것일 테니까.
여금미/ 파리 3대학 영화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