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를 만들었던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2002년 작품 <디 아워스>는 세겹의 하루를 다루고 있다. 그 세겹의 하루는 역시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을 다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짜여진다. 허구의 텍스트가 허구의 현실을 구성하는 근거 역할을 하는 흥미로운 구조의 이 영화는 매우 조직적으로 수십년의 간격을 두고 존재하는 세겹의 현재를 조명해내고 있다. 이 세개의 하루는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텍스트를 각각 다르게 읽어내는 일종의 ‘반복’이기도 하다. 물론 이 동어반복은 세월의 차이를 통해 각각 다르게 변주되고 있다.
음악을 맡은 사람은 필립 글래스. 그는 반복과 변주라는 이 영화의 메커니즘에 잘 어울린다. 미국이 배출한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의 음악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미니멀리즘’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미니멀리즘의 태두라면 역시 스티브 라이히다. 스티브 라이히의 미니멀리즘이 좀더 급진적이고 철학적이라면, 필립 글래스의 그것은 더 색채 중심이다. 젊었을 때 아프리카와 인도를 방랑하면서 그의 음악 안으로 들어온 ‘월드뮤직’적인 요소들도 ‘지역성’보다는 ‘색깔’로 기능한다. 그런 차원에서 그의 음악을 조금 시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의 음악은 생각의 뿌리깊음이나 삶에의 끈질긴 집착을 소리로 드러내 보여주는 음악은 아니다. 대신 끊임없이 솟아올랐다가 사라지는 물방울 같은 소리들을 반복, 변주하여 그 덧없는 순간 자체를 보여주는 음악이다. 그의 음악은 월드뮤직적인 색채를 포함, 다양한 뿌리를 지닌 소리의 요소들을 감싸고 있지만 그것들은 단지 덧없는 소리의 문양의 일부를 이루는 색채적 성격만을 지니고 있다. 일종의 ‘탈주관적’ 얼굴 지우기인 이런 음악적 특성 때문에 그의 음악은 포스트모던한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한다. 주로 진지한 현대음악계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 필립 글래스이지만 그의 음악은 본질적으로 탈장르적이다.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하고 브라이언 이노와 함께 앰비언트 사운드를 실험하기도 한 그는 연극음악, 영화음악 분야에서도 자기 색깔을 실험해 오고 있다. 근작인 <쿤둔> <트루먼 쇼>를 비롯, 수많은 영화에서 그의 독특한 미니멀리즘을 만날 수 있다.
<디 아워스>에서의 그의 음악은 생각보다 고전적인 사운드를 내고 있다. 화성적으로 반복 진행되는 아르페지오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음악은 바로크음악에서 들을 수 있는 단아한 격자무늬들을 연상시킬 만큼 단아하다. 어떤 면에서는 영화의 진행을 적극적으로 따라가거나 관객의 심리를 끌어가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영화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의 음악이다. 반복과 변주의 형식을 지닌 영화를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반복과 변주의 형식으로 아로새겨지는 차분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필립 글래스는 어딜 가도, 어느 분야의 음악을 해도 그만의 독특한 색깔로 청각을 물들인다. 전세계적 폭을 지닌 그의 음악적 캔버스에 그려지는 음악은 늘 비슷비슷한 음악적 문양들이다. 그것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지루함 자체가 그의 음악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