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고픈 홍콩, 홍콩이고픈 중국
한때, 우리는 오우삼의 주식을 나누어 가지고 산 적이 있었다. 불뿜는 쌍권총 대신 두 손가락을 치켜들며, 이쑤시개를 질겅거리며, 벽에는 주윤발의 사진을 도배했던 시절.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신화가 아니다. 홍콩누아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03년 지금, 우리 주변에는 부유하는 홍콩누아르에 대한 추억 외에 홍콩누아르라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시선은 거의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주변에 널린 것은 바바리와 이쑤시개와 우리가 한때 오우삼의 신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한 줄을 잇는 고해성사들. 삼류극장에서의 재회, 매혹, 떨칠 수 없는 윤발에 대한 사랑, 밀키쓰 사랑해요. 빌어먹을 오히려 나는 그 시절을 깡그리 삭제하고 싶을 때가 있다.
1986년,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단 두 군데였다. 프로야구와 싸구려 에로물과 마틴 스코시즈의 걸작을 함께 틀어주던 학교 주변의 삼류극장. 물론 그 목록에는 임영동의 <풍운> 삼부작과 이수현의 경찰영화, 정소동의 <천녀유혼> 시리즈, 온갖 강시물과 서극과 성룡의 영화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단 하나의 출발은 바로 <영웅본색>이다. 본능적으로 나는 <영웅본색>을 샅샅이 살펴봐야 한다고 느꼈다. 홍콩누아르에 대한 담론마저 신화가 돼버린 즈음, 그 거울을 깨고 간절히 <영웅본색>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영웅본색>, 그들이 신이었을 때
기실 <영웅본색>은 단 하나의 강박관념에서부터 시작하는 영화이다. 아호(적룡)는 소마(주윤발)가 자신을 위해 복수를 하다 죽임을 당한 것을 잊지 못한다. 첫 시작부터 맨 마지막을 보여주며, 오우삼은 그리고 홍콩누아르는 그 가슴에 단 주홍글씨가 의리와 복수라는 동양적 남성적 가치관임을 숨기지 못한다. 자본주의 질서를 교란하는 위조 지폐범이란 설정에도 불구하고 아호나 소마 모두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가치관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아호는 동생 아걸이 박사학위를 받고 성당에서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소마는 배신이나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 아비규환 같은 지옥의 총격전에서도 그들이 살아서 사바의 세계로 귀환해야 하는 까닭은 그들에겐 아직도 지켜야 할 의리가 있고, 기다려주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윤발은 <영웅본색>에 이르러서 비로소 피에로에서 신으로 승천하는 날개를 단다. 잊지 못할 요정에서의 총격전, 아호의 복수를 위해 바바리코트 흩날리며, 화분에 총을 숨기는 그는 이미 적이 어느 방향에서 나올지 훤히 꿰뚫고 있는 신이었다. 그의 쌍권총은 마치 미래를 예언하듯 자신이 겨누어야 할 대상을 향해 정확히 불을 뿜는다. 그런 그가 총격전 끝에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는 것은 일종의 아킬레스건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소마가 철제다리를 이끌며 조직에서 눈칫밥 먹는 신세가 되었을 때, 주윤발은 신에서 인간으로 추락한 것이 아니라 신에서 병신으로 추락한 것이었다. 그 낙폭의 차 때문에 사람들은 감히 윤발을 인간계에 포함시키지 못한다. 소마는 자신을 배신한 보스 앞에 철제다리를 내놓으며, ‘이 술은 내 다리가 마시는 것’이라며 술을 붓는다.
사실 <영웅본색>은 코미디와 신파가 뒤섞이고 액션과 총질이 뒤엉켜 있는 그저 그런 홍콩영화였다. 그때도 지금도 다시 보아도, 나는 <영웅본색>을 결코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지 않는다(내가 꼽는 오우삼 최고의 영화는 <첩혈가두>이다) 총싸움 장면 역시 뒤에 나왔던 <영웅본색2>나 <첩혈쌍웅>에서처럼 그 빈도나 분량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직 주윤발의 바바리코트와 쌍권총만을 기억한다. 그리고는 <영웅본색>이 그런 장면들로 피칠갑이 되어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장면, 부두에서의 총격신과 요정에서의 총격신의 미학, 그 유혈이 낭자한 폭력미학의 핵심은 바로 오버였다. 우리는 오버를 원했고 오버를 보았고 오버에 미쳤다. 쌍권총, 이 남근적 대리물은 하나도 아니고 반드시 둘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크로넨버그의 자궁 둘 달린 여자와 비슷하게 과잉의 테스토스테론에 대한 헌사와 맹목의 숭배였다. 무자비한 총의 돌파력이 어떤 막힘도 없이 휘발유통을 꿰뚫고 남자들의 육신을 벌집 쑤셔놓듯 관통할 때, 그 태도는 ‘눈앞에 거치적거리는 것은 다 없애버리겠다는’ 완전 거세를 향한 폭발적인 의지의 구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분노이자 두려움이었다. 오우삼의 폭력미학이 필연적으로 오버일 수밖에 없는 개연성의 밑바닥에는 자신이 죽인 그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주윤발과 관객이 혼연일체가 되어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이 가라앉아 있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튀기며 온몸에 총구멍이 나는 방식 그대로 스스로도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감하는 자가 토해낼 수밖에 없는 과잉. 이후 오우삼의 모든 대사에는 주석처럼 클로즈업이 따라붙었고 모든 동작에는 슬로모션이 치장되었으며, 어김없이 거울 바닥에 카메라를 올려놓은 듯한 미끄러지는 트래킹이 끝도 없이 아비규환의 현장을 지켰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도 이해할 것이다. <첩혈쌍웅>의 첫 대사가 ‘신을 믿나?’ 였다는 것을. ‘신을 믿나?’ ‘당신이 오우삼을 믿나, 당신이 주윤발을 아는가?’ 그것은 오우삼이 홍콩누아르라는 심연의 총구멍으로 향하는 마지막 암호를 당신에게 물어본 것이나 마찬가지의 제의이기도 했다.
<무간도>, 과거의 과잉을 지웠다
그런데 새로 나온 영화 <무간도>에는 이러한 과잉이 없다. 명맥이 끊어졌던 홍콩누아르를 다시 보는 반가움도 잠시, <무간도>는 폭력이라는 포장에 휩싸인 우정의 대서사를 말끔히 밀어내고, 맨들맨들한 스릴러의 각진 턱을 내민다. 그러나 시중에 유포되고 있는 영화평처럼, <무간도>가 <페이스 오프>의 아류작이라거나 <페이스 오프>와 비교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고래로 홍콩누아르의 중핵은 ‘위치의 역전’에 있었고, <페이스 오프>는 홍콩누아르의 작은 정맥혈일 뿐이다. <영웅본색>에서는 두목과 부하가 위치를 바꾸고, <첩혈속집> 역시 첩자인 아량은(<무간도>에서처럼 양조위가 분한 이중스파이!) 결국 형사인 주윤발과의 지나친 유대관계로 인해 자청해서 죽음의 불구덩이로 향한다. 물론 킬러와 형사가 지나친 동일시의 기제로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첩혈쌍웅>은 그중 절창이지만.
과거 홍콩누아르에서 사내들의 역전된 관계는 믿음의 부재에 따른 지옥 같은 현세의 계율이자, 쌍권총 하나면 모든 사물이 파괴되는 인생 허무의 늪에서 피어나는 클리셰였다. 그런데 경찰이 된 양아치과 양아치가 된 경찰의 이야기인 <무간도>에 이르러서는 이 위치의 역전이, 믿음의 부족이 오우삼이 할리우드에 와서도 포기하지 못했던 남자들의 공동체, 특히 의리로 묶인 혈맹의 판타지까지 파괴해버린다. 그래서 <무간도>는 믿음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의심에 관한 영화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그곳, 영웅이 없어진 그곳에서 신화의 세계는 완벽히 해체되고, 더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사내들은 다만 생사의 서바이벌 게임을 벌일 뿐이다.
이제 홍콩누아르의 가장 중요한 소도구는 쌍권총이 아니라 휴대폰이며, 양조위와 유덕화가 서로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도구도 바로 이 첨단의 기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소형 녹음테이프나 감시카메라 등 온간 현대적 장비가 동원되어 서로의 존재를 탐침하고, 필름누아르의 잔상은 황 국장이 죽은 뒤 경찰과 조직 폭력 배간의 단 한번의 짧은 총격전으로 보상받는다. 그곳에는 오우삼식 속도의 변주 대신, 면도날 같은 연출과 편집이 시한폭탄처럼 째깍인다. <무간도>는 서두르지 않고 스파이의 비밀과 거짓말의 게임, 그 살벌한 속내를 차근차근 잡아내어 간다. 디테일에 신경쓰고 음악과 교차편집 그리고 빠른 화면 전환에 기댄 영화는 홍콩누아르의 인장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다분히 할리우드 감각으로 무장해 있다.
그래서 <무간도>는 제목에서 지옥의 의미를 빌려왔지만 종래의 오우삼식 홍콩누아르가 보이는 제의적인 기능에 기대지 못한다. 주인공의 죽음은 비둘기 혹은 아기, 혹은 성모 마리아상 같은 장식들을 거부한다. 무엇보다 <무간도>는 비장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비장한 죽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모든 홍콩누아르가 장엄한 죽음의 순간을 향해 피로 분탕질한 레퀴엠을 울려대는데 비해 <무간도>에는 죽음을 묘사하는 단 한 장면도 들여놓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많은 홍콩누아르는 부두에서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다.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들은 흔히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만 그것에 대비하거나 손쓸 겨를 없이, 피를 철철 흘리며 드넓은 부둣가나 성당에서 죽어간다. 그리하여 그들은 홍콩의 불안을 대속하고, 거대한 운명성을 향해 양기 절정의 남신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첩혈속집>에서 형사인 주윤발은 첫 등장부터 이런 대사를 던졌다. ‘이민갈 생각 없어?’ <첩혈가두>에서 주인공 폴은 돈을 위해 친구인 프랭크(장학우)의 머리에 총을 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프랭크는 머리에 박힌 총알을 빼낼 수가 없었다. 머리에 박힌 총알. 지울 수 없는 상흔과 광기. 당신의 홍콩은 바로 그러했었다. 1997년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은 <첩혈쌍웅>의 제니처럼 실명했고, <첩혈속집>에서처럼 환자들을 치유할 수 없는 병원이었으며, <감옥풍운>에서처럼 거대한 감옥, <메이드 인 홍콩>에서처럼 자정 불가능한 장소, 혹은 공동묘지였다. 그러나 그래도 홍콩은 늘 탈출을 꿈꾸었다. 낯선 땅에 가서 떠도는 이방인이 될지라도, 홍콩누아르의 주인공들은 늘 발없는 새가 되길 원했고, 부둣가는 그들 삶의 종착역이자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홍콩은 더이상 갈 곳이 없어 보인다. <무간도>가 택한 장소는 부둣가가 아니라 바벨탑의 꼭대기 같은 장소, 옥상이다. 양조위가 황 국장과 접선하고, 유덕화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미는 장소. 그곳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 추락 외에는 더이상의 도피가 불가능한 한뼘의 땅이었다.
그래도 <무간도>는 근자에 본 홍콩영화 중 가장 재미있었다. 차가운 푸른색에 담긴 영화는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개탄을 지나 결정적 대사를 읊으며 상대편의 머리에 단 한방만을 날릴 수 있는 절제심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무간도>는 주윤발과 이수현 없이도, 오우삼과 임영동이 빠져도 홍콩누아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선언과도 같다. 이제야 홍콩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0년간 경찰행세를 하고 있는 조폭과 같은 기간에 조직에 잠입해 있던 경찰. 두 사람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홍콩 대신, 중국이 되고 싶어하는 홍콩과 홍콩이 되고 싶어하는 중국의 자화상은 아닐까?
그리하여 과거는 가버렸다.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선언이 흙먼지나던 운동장을 뽀얗게 뒤덮던 5월. 홍콩누아르는 386세대, 우리의 거울이었다. 양기 출중한 남신 숭배가 아니라면 견뎌내지 못했을 피폐해진 봄과 여름. 아드레날린 가득한 오버의 신전에서 오직 그 신파적 감정의 무아지경만이 남자가 되었다고 느끼던 시절. 나는 아직도 도서실 앞을 점거한 전경들의 식판에도, 도시락을 까먹던 우리의 입 안에도 똑같은 황사 모래가 어기적어기적 씹히던 그 감촉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무간도>가 그러하듯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자. 일그러진 폭력과 분노의 배출구, 주윤발이란 신이 관장하던 홍콩누아르의 신전은 이제 영영 가버리고 없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