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과의 대화>라는 유명한 책의 첫 번째 장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어린 시절에 대한 한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그것에 따르면 네살 혹은 다섯살가량 되었을 나이의 어린 히치콕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하기 짝이 없게도 경찰서 유치장에 10분쯤 갇힌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부당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는 어린 시절의 이 끔찍한(그래서 잊지 못할) 기억은 쉽사리 지워내기 힘들었던 것인지 히치콕의 우주에는 유난히 누명 쓴 사람들(the wrong men)이 많이 등장한다. 당장 생각나는 예만 들더라도, 순순히 이혼을 해주지 않는 아내의 살인자로 지목되고만 <스트레인저>(1951)의 테니스 챔피언이나 고해 내용을 밝힐 수 없는 처지로 인해 살인용의자로 의심받게 되는 <나는 고백한다>(1952)의 마이클 신부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55년작인 <나는 결백하다>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누명의 올가미에 걸려든 한 인물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까지의 필사적인 과정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 존 로비(캐리 그랜트)는 과거 ‘고양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대도(大盜)로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결국 감옥에 가게 된 그는 독일군의 공습을 틈타 탈옥한 뒤 레지스탕스에 합류해 훌륭한 공적을 쌓는다. 그리고 그 전공(戰功)으로 인해 가석방을 받아 전쟁이 끝난 지금은 남프랑스의 한 고급 빌라에서 한적하고 평화로운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 때에 리비에라의 고급 저택과 호텔 등에서 값비싼 보석들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줄줄이 일어난다. 이 범죄들에 쓰인 수법은 과거 ‘고양이’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 당연히 존은 경찰과 예전 레지스탕스 동료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드디어 활동을 재개한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스스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값비싼 보석을 가지고 있는 이들, 즉 앞으로 있을 범행의 표적이 될 만한 사람들을 조사하던 중에 존은 미국인 상속녀 프랜시(그레이스 켈리)와 알게 된다.
영화의 원제인 <도둑 잡기>는 ‘도둑은 도둑이 잡게 한다’(Set a thief to catch a thief)라는 속담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것은 영화의 기본 진행방향을 글자 그대로 요약해준다. 아마도 도둑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왕년의 유명 도둑이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진짜 도둑을 잡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그린 게 이 영화인 것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응당 손에 땀이 가득 나게 하는 스릴러영화를 기대할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흥미로운 추격장면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긴박한 페이스를 밟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급하게 굴지 않는 건 다급한 상황에 빠진 주인공 존도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게다가 후던잇(whodunit)영화로서도 <나는 결백하다>는 아주 흥미진진한 지적인 게임을 마련해놓지 않는 편이다. 여기서 잠깐만 힌트를 흘리자면, 존과 닮은 데가 있는 한 인물이 범인이란 것은 어느 정도 스릴러영화들을 봐온 사람이면 처음부터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결백하다>가 스릴러영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합격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영화인 것은, 존이 도둑을 잡으려 한다는 기본 설정이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히치콕식으로 말하면 맥거핀)에 해당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히치콕은 기본적으로는 스릴러로 틀을 잡아놓고서 그 위에다가 특히 대사의 묘미가 살아 있고 또 남프랑스의 매혹적인 풍광마저 돋보이는, 경쾌하면서도 격조있는 로맨틱코미디로 보기 좋은 장식을 꾸며놓는다. 이제 영화의 원제를 다르게 이해하자면, 이건 프랜시라는 한 여성이 ‘도둑’ 존을 ‘포획’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로 볼 수도 있다. 겉모습만 보면 그저 도도하게 우아할 것만 같은 프랜시는 어떻게든 남다른 인물인 존에게서 특별한 매력을 발견한 뒤 자신의 숨겨진 열정을 끌어낸다. 그런 면에서 <나는 결백하다>는 한 남자가 도둑인 여자를 ‘가지려’ 애쓰는 이야기를 그린 히치콕의 영화인 <마니>(1964)와 네거티브한 관계- 유혹하는 자와 그 대상의 성별이 전도된 것 외에 한쪽은 그 톤이 경쾌한 반면 또 다른 쪽은 심각하다는 점에서도- 에 놓일 영화로 간주해도 될 것이다.
그런 영화이니만치 여기서 히치콕이 최고조의 스릴에 오를 법한 장면을, 프랜시가 존을 본격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에서 찾아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재치있게 미묘한 대사, 시적인 정취의 비주얼, 유머러스하게 에로틱한 감정이 절묘하게 어울린 이 시퀀스는 관능의 스릴이라 이름 붙일 또 다른 유의 스릴을 뿜어낸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To Catch a Thief, 1955년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출연 캐리 그랜트, 그레이스 켈리자막 영어, 중국어, 한국어, 타이어오디오 돌비 디지털 모노화면포맷 1.85:1출시사 파라마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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