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믿고 싶은가요?
<엽기적인 그녀>로 동급최강의 흥행을 기록한 감독의 신작 멜로영화가 개봉되었다. 전작이 깨는 여성상을 그렸다는 이유로 관객과 여성 평단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을 상기해보면 <클래식>의 다소곳한 분위기는 전작과 사뭇 달라 보인다. 그러나 기실 <엽기적인 그녀>는 깨는 장치들을 활용했을 뿐 전체적인 서사나 구조는 지극히 보수적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녀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었으며, 둘째, (혈연을 근간으로) 만날 사람은 어쨌든 만난다는 운명론을 펴고 있으며, 셋째, (이 점이 가장 중요!) 그녀는 대상이었을 뿐, 바라보고 기술하는 주체는 차태현이었다. 즉 그녀의 행동들은 그의 눈을 통해 ‘엽기적이지만 사랑스럽다’는 미적 판단이 된 상태로 우리에게 보여진 건데, 그 ‘사랑스러운’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의 외모가 그의 이상형이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엽기적인 그녀>의 파격성은 새로운 여성 캐릭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남성 기호에 있는 셈이다. ‘우린 입맛이 좀 달라졌다우~ 예쁘면 웬만한 것도 다 용서가 되지. 좀 튀면 더 귀엽지~’ 객체인 그녀가 헤어진 뒤 또다시 ‘과거’에 결박되는 데 반해 시선과 기술의 주체인 그는 자기 반성을 통해 발전한다.
<클래식>은 전작의 세 가지 보수성 중 첫사랑과 (혈연적) 운명의 신화를 더욱 공고히 하며, 역시 시점 조작을 통해 ‘대를 이은 사랑’,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눈속임을 감행한다. 이 글은 ‘안 속는(“거의 완벽했어… 속을 뻔했다구”) 구조 버전’과 ‘속아주는, 아니 속았다 치는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구?”) 효과 버전’으로 나누어 기술된다.
하마터면 속을 뻔한 ‘구조’ 버전 - 전통의 창조 혹은 날조
사극을 보면서 “어쩌면 저 때도 지금이랑 똑같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우리처럼 연애하고 우리처럼 정쟁하는 사극의 인물들은, 약간의 기록에 우리의 욕망과 감성과 영혼을 불어넣어 재창조한 이들이다. 어디 사극뿐이랴. 역사 또한 현재의 관점(사관)에서 사료를 재구성하여 기술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를 호출하고 재구성하여 역사를 만들며,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로 현재의 정당성을 삼는다.
액자 형식을 띠는 <클래식>에는 두개의 시간이 흐른다. 딸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는 현재의 장면들에서 시점의 주체는 당연히 그녀이다. 과거 장면들은 그녀가 편지와 일기를 토대로 상상한 것들인데, 시점의 주체는 대부분 준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딸이 엄마의 사랑 이야기를, (단둘이 살아 친근할 테고, 꼭 닮아서 심지어 1인2역으로 나오는) 엄마의 시점도, (일찍 여의었지만 인정상 끌릴 법도 한) 아빠의 시점도 아닌, (생면부지) 준하의 시점에서 상상, 기술하다니…. 그 이유는 물론 사료(편지와 일기)의 언표행위의 주체가 준하라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는 준하와 같은 위치에 있는 자신을 그와 동일시하여, 그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준하의 사랑은 대단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그것을 표현하고 확신하지만 그녀는 정략적인 약혼에 묶여 있다. 더욱이 그때는 학교, 가정, 사회가 훨씬 폭압적이었다. 그들은 고민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이어간다. 이들 사이에서 친구가 목을 맨다. 그에 비하면 현재 그녀가 봉착한 문제는 별것 아니다. 그녀도 ‘친구의 남자’를 사랑하지만, 둘이 약혼한 사이도 아니고 다만 친구가 먼저 찜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좀처럼 표현하지 못한다. 엄마는 그 시절에 약혼자 눈을 피해 야시시한 눈짓도 잘만 주고받더만, 딸은 왜 눈길조차 못 마주치는 걸까? 과거의 약혼자는 (나중에 목을 맬지언정) 알아서 길도 잘 터주더만, 현재의 친구는 웬 난리 블루스일까?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녀의 굴절된 욕망이 투사된 시점의 효과’ 때문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믿거나 오우 말거나 말이에요, 펜실베이니아…) 그녀는 현재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지만 스스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으며, 친구보다 더 확고한 정당성을 갖기를 원하고 있다.
그녀는 갑갑한 현재의 상황에서 편지와 일기(사료)를 읽으면서, 친구라는 장애물과 소통의 어려움이 해소되길 바라는 자신의 욕망을 준하의 사랑(역사)에 투사시킨다. 그러기에 정황이나 사건으로는 과거가 훨씬 살벌하지만, 그들은 순탄하게 사랑을 확인하고, 피비린내나는 감정의 쟁투없이 ‘싸나이들의’ 우정을 유지한 것으로 ‘따뜻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에서 그녀는 말을 못하고, 친구는 미워 죽을 판이다. 미워하는 그녀의 눈으로 친구를 보니, 당근 ‘오버의 여왕’으로 보일밖에. 그래서 목매는 장면에선 눈물이 나지만, 손목을 땄다는 장면에선 비웃음이 터진다. 상상 속의 이야기엔 악인이 없지만, 현실의 맥락에선 ‘나의 적이 곧 악인’이다. 준하가 목걸이를 걸어두고 사라지는 장면에서부터 엄마의 시점으로 바뀐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뒷부분은 엄마가 직접 들려준 부분으로 언표행위의 주체가 엄마다. 병실 밖 퍼레이드 장면에서 “엄마와 아빠의 그 다음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다”며 엄마, 아빠 재회장면이 이어진다. 아마도 엄마의 직접 진술은 아빠와의 재회에 더 비중이 있고, 준하와의 재회 기억이 단편적으로 삽입된 것이었을 텐데, 딸은 상상으로 준하와의 사랑을 부풀려 재구성한 것이리라. 둘째, 그녀는 사랑을 얻기까지의 그에게는 감정이입을 하고 싶어도, 운명으로 인해 실패한 그에게는 더이상 동일시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친구 약혼자’의 사랑을 얻어낸 준하의 성공담을 재구성하여 자신의 전범으로 삼는다. 그 신화를 애인에게 들려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듣더니 돌연 목걸이를 걸어준다. 아니, 바로 이 목걸이는! 그런데 잠깐, 어떻게 그녀가 그 목걸이를 알아보는가?(실물크기 컬러 사진이라도 있었나?) 목걸이를 알아보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우리다! 관객은 절묘한 1인2역과 시점의 변주로 지금껏 내내 본 이 목걸이를 당연히 그녀도 보았을 것이라고 착시를 일으킨다. 그녀는 아버지 이름이라도 확인해보는 최소한의 절차도 생략하고 그대로 믿는다(근거는 메모와 목걸이인데, 메모는 인용문이라면 우연일 가능성이 높고, 목걸이는 본 적도 없다). 아! 그가 바로 내 ‘운명의 사랑’이야! 부모가 정략적으로 맺어준 관계보다 더한, 부모의 못다 이룬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보다 더한 정당성이 어디 있으랴!)라고 ‘맹신’한다. 왜? 믿고 싶으니까!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고, 그녀는 복을 받을 것이다(이 영화를 홍상수 감독이 만들었다면 그녀가 신화를 재구성하며 도취되는 것을 3인칭 시점으로 잡은 장면과 그가 목걸이 하나를 습득/갈취하는 장면, 그리고 그가 ‘남의 얘기라도 섧네. 군대가서 뺑이 쳤던 생각 나네. 뭔 이야기가 목걸이, 목걸이 타령이기에 걸어줬더니 아주 환장을 하네…’ 생각하는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이때 그녀가 따진다. “목걸이가 같은 거였다고 믿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인가요?” 맞다! 우리는 원한다, 운명적 사랑을. 왜? 외로우니까!(아하♬ 그렇구나)
속았다 치는 ‘효과’ 버전 - ‘차이’도 없는 ‘반복’의 역사 순환론
역사는 과거만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를 전통의 이름으로 잡아두기도 한다. 전통은 역사로부터 나왔으나 마치 역사를 초월하는 항구불변의 양식인 양 기능한다. 현재는 역사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장악하며 몰역사적으로 보편화된다. 조상들도 ‘이렇게’ 살았고, 지금 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당연히 ‘이렇게’ 살수밖에 없다…. 이게 인간의 삶이다! “클래식”이란 그저 “촌스럽다”는 뜻의 우아한 표현이 아니라, ‘전형적인 가치와 영원성이 있다고 믿어지는 모범적인 양식’을 일컫는 말이다. <클래식>이 30년을 사이에 둔 두 사랑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사랑의 ‘클래식’한 양식이 뭘까? 1:2의 삼각관계, ‘소나기’맞기, 편지대필, 자해공갈, 선망하면서 표현하지 못함 등인가?
<버스, 정류장>에는 “세월이 지났으면 좀 다르게 살아라!”라는 고착/답습에 대한 환멸의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클래식>은 30년이 지나도록 하는 짓이 똑같은 두개의 사랑을 겹쳐 보여주면서, 환멸이 아닌 오마주를 보내고 있다. 이는 단지 ‘과거는 아름다웠다’는 맹목적 회고주의의 미학적 산물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하는 짓은 똑같다’는 반동적 보수주의가 이 영화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통해 ‘차이와 반복’을 보여주는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는 “당신 안의 나, 내 안의 당신”이라는 메모가 미세하게 변주되는 그 틈새에 명숙과 선영이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포개지는 “태양이… 달빛이…” 메모는 주체가 비집고 설 틈을 없앤다. 우리는 누구인가? 에미 애비의 자식, 운명의 꼭두각시, 고래로부터 유전되는 방식으로 똑같이 살아가는 무수한 인간들 중 하나. 과거의 사랑은 흡사 그들의 전생 같다. 차이도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영겁회귀의 생지옥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놓다니! 영화 속 70년대의 사회/학교/가정의 파시즘은 이 ‘운명’과 ‘대를 이은 사랑’을 운운하는 숙명론적/순환론적/세습적 세계관이 짓누르는 억압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2000년대의 사랑을 1970년대의 사랑과 똑같이 그리다보니 고리타분해질 수밖에. 그녀의 쭈뼛거리는 짝사랑과 상민의 김빠진 대사는 마치 <동감>의 79년 사랑을 보는 듯하다. <시라노>에서 <중독>에 이르는 편지대필의 역사는 매체가 이메일로 바뀌면서 효력을 잃는다. 문학적 아우라가 폐기되고 완전언문일치가 이룩된 지금, 명문장을 추구한다면 검색하여 짜깁기를 하고, 친근감을 추구한다면 직접 ‘방가방가’를 때리면 되지, “유치해서 좋은” 이메일 대필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기에 ‘미디어가 메시지’라지 않은가?) 노처녀 누나로 나오는 임예진은 <마들렌>에서 엄마로 나오는 이미영보다 연배가 위다(세대가 바뀌었당께~). 대체 누구를 위한 복고인가? 혹시 관객의 향수가 아닌 감독의 향수에 복무하는 것은 아닌가?
<클래식>은 애증을 탈색하여 과거를 표백하고, 진부한 ‘첫사랑’ 신화와 ‘운명’이라는 봉건성을 꼬아 짠 촘촘한 그물이다. 이 그물은 자유롭게 유영하는 개인을 포획하고, 관습적 사랑이 마치 ‘세대를 초월하는’ “클래식”한 항구불변의 보편적 원형이라도 되는 양 “공갈”을 친다. 교묘한 시점처리와 1인2역, 효과적인 배경음악과 배우들의 호연(好演), 그리고 뽀시시한 화면발 덕택에 관객은 “거의 속을 뻔”한다.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