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 전쟁의 아픔 정치적 이용 말라제53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종반에 접어든 12일 수요일 아침(현지시각), 베를린의 모든 일간지 머릿기사를 장식한 영화인은 더스틴 호프먼이었다. 그는 전날 저녁, 유니세프가 영화제에 맞춰 개최한 ‘평화를 위한 영화’ 행사장 연단에 올라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영화인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부시 정부가 9.11 테러 이후 미디어 조작을 통해 테러의 고통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고 있다고 더스틴 호프먼이 맹비난하는 동안, 페이 더너웨이와 조지 클루니, 로저 무어 등의 ‘스타’들이 자리를 지켰다.
이날 저녁, 스파이크 리 감독의 본선 경쟁부문 진출작 의 언론시사가 끝난뒤 열린 기자회견 역시 9.11 논쟁으로 시작됐다. 영화에서 뉴욕의 마약중개상 몬티(에드워드 노튼)는 그동안의 범죄사실이 발각돼 감옥행을 앞두고 있다. ‘25시’는 몬티가 처한 한계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9월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도시 뉴욕의 상황을 지칭한다. 남은 시간동안 가족과 연인과 이웃의 관계를 반추하는 몬티와 뉴욕의 이미지들이 이따금 섞여든다. “9.11이 이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질문에 영화 속에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노튼이 먼저 발끈 했다. “바로 뉴욕에서 일어난 일이다.” 뉴욕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반론이었다. 파국을 앞에 둔 몬티와 재앙을 경험한 뉴욕의 혼돈과 불안을 병치시켜가던 영화는 몬티의 경우에 관해 희미한 해답을 보여준다. 도망가지 않기, 7년형을 받아들이기.그렇다면 분노에 찬 미국과 뉴욕은 영화는 이 질문에 직답을 피했지만 “그렇다면 대이라크 전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노튼이 먼저 대답했다. “동일한 생각을 가진 정부를 둔 프랑스와 독일 국민이 부럽다. 미국이 전쟁을 포기하도록 국제사회가 연대해서 계속 압력을 가하기 바란다.” 스파이크 리는 “미국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강요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우울하면서도 리듬감 넘치는 영화 만큼이나 흥분된 상태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은 열광적 박수로 마감되었다.반전시위 속에서 시작되고 끝이 날 베를린영화제에 영화 밖의 정치성이 끌려들어온 것일까. 마이클 윈터보텀의 다큐멘터리 같은 극영화 <인 디스 월드>가 난민들을 싣고오는 화물차를 클로즈업했다면, 독일의 젊은 감독 한스 크리스챤 슈미트 역시 <리히터>를 통해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도시를 배경으로 난민과 국경의 의미를 묻는다. 두 나라를 경계짓는 오더강 양쪽, 다양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가는 다초점 구성능력이 탄탄하다. 베를린 영화제를 독일영화 진열대로 활용하겠다는 디히터 코슬릭 집행위원장의 ‘야심’에 대한 응답과 같은 영화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중국 리양의 첫 극영화 <망징>의 주인공은 탄광도시를 전전하며 갱도 속에서 동료 광부를 살해하고 사고를 위장, 보상금을 챙기는 떠돌이 노동자 송과 탕. 송은 새로운 희생자로 포섭한 소년에게서 고향에 두고온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차마 작업에 착수하지 못한다.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급변하는 중국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탄광촌의 비인간적 환경에서 포착해냈다. 이 영화는 장이모 감독의 화려한 대작 <영웅>의 그늘에서 진행되는 전투의 증거물이다. <영웅>식 국가주의 또는 패권주의 대신 ‘평등한 사회주의’를 지향한다.<인티머시>로 이미 베를린의 황금곰상을 수상한 적 있는 파트리스 셰로의 <그의 형>은 소수의 제작진과 적은 등장인물로 죽음과 형제간의 갈등을 정밀하게 파고든 영화. 심리적 사실주의의 전범이라 할 만 하다. 정교한 시간구성과 심리묘사로 베를린을 휘어잡은 또다른 영화는 단연,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다. 초반에 상영됐으나 현지에서 발행되는 영화제 데일리와 일간지의 평론가 평점에서 여전히 수위를 달리고 있다. 베를린 영화제는 16일 막내린다. 베를린/안정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