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된 오이디푸스의 강박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이상한 시선이다. 영화 초반의 한 에피소드에서, 그는 자신의 부모가 거실에서 행복하게 춤추고 있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때 그는 지그시 거실 바닥의 하얀 양탄자를 응시하는데, 거기엔 조금 전에 어머니 폴라가 실수로 흘린 포도주 얼룩, 그 붉은 얼룩이 묻어 있다. 이 얼룩은 클로즈업을 통해 강조된다. 그러나 재빨리 장면은 멋들어진 포즈로 아내를 안고서 아들 프랭크에게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그의 아버지를 보여주는 풀 숏(full shot)으로 전환된다. 포그 필터(fog filter)를 통해 촬영된 이 장면은 프랭크에게 매우 환상적인 것으로 비친다.
프랭크의 이상한 시선이 다시 한번 보여지는 에피소드는 그가 자신과 약혼하기로 한 간호사 브렌다의 부모를 방문하는 부분이다. 이들 부부는 사윗감 프랭크와 딸과의 식사가 끝난 뒤, 나란히 주방 싱크대 앞에 서서 천천히 몸을 좌우로 흔들어가며 다정하게 설거지를 한다. 프랭크는 우연히 이 모습을 보게 된다. 앞서 자신의 부모가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와 똑같이- 차이가 있다면 기대고 있는 방향이 서로 반대라는 것이다- 문가에 살짝 기대어 서서 말이다. 그런데 부부를 바라보던 프랭크는 잠깐 시선을 떨어뜨려 그들의 발치쪽을 바라본다. 이와 같은 시선의 움직임은 그의 시선이 완전히 아래로 떨어지기 전까지 세번 반복된다. 그러나 이번에 프랭크는 어떤 얼룩도 발견하지 못한다.
얼룩은 예시가 아니라 징후
만일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의 프랭크의 운동이 로버트 저메키스의 영화, 특히 <백 투 더 퓨처>에서의 마티의 운동과 닮은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얼룩에 조금쯤은 관심을 가져봄직도 하다. 프랭크와 마티는 모두 강박적인 환상에 사로잡힌 인물들이다. 그들은 거기서 붕괴된 가족을, 무엇보다도 ‘강탈당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본다. 프랭크의 어머니를 강탈해간 아버지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잭 반스는 마티의 어머니를 강탈해간 악당 비프의 재래라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또한 프랭크가 결국 자신의 부모가 댄스파티를 통해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몽샤르)로 찾아가는 것은, 어긋난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마티가 과거의 댄스파티 현장으로 찾아갔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미묘한 전환을 통해 저메키스의 영화와는 사뭇 달라진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얼룩은 계시가 아니라 징후이다. 즉 이를테면 <미지와의 조우>의 주인공을 사로잡은 기이한 형상과는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프랭크로 하여금 현재의 선택을 통해 미래를 예비하거나 막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것은 나중에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그 진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그러나 이미 그때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낯선 대상이자 실재의 작은 틈이다. 혹은 신의 실수이거나 장난이다. <A.I.>의 로봇 데이빗에게 주어진 닥터 노의 거짓 신탁과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앤더튼에게 던져진 그 자신의 미래의 범죄에 대한 프리크라임 시스템의 예언은,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완전히 추상화된 대상, 즉 얼룩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소개한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프랭크는 행복하게 설거지를 하고 있는 부부의 발치를 바라보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되며, 이젠 존재하지 않는 얼룩을 통해 이전의 얼룩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얼룩은 결과(가족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에 관해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프랭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프랑스의 몽샤르에서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선 떠오르는 문제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프랭크에게는 드로리안(<백 투 더 퓨처>의 차)이 없다는 것이다(굳이 말하자면 드로리안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그 자체이다. 이때 다분히 자기반영적인 이 이야기에서 마티는 스필버그 자신이 된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원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과 같은 소설로부터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를 거쳐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까지 나타나는 물리적 가능세계, 이른바 다지시공(多支時空)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시간적 분기점이 어디인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설령 프랭크에게 드로리안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또한 어쨌거나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실화’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제 프랭크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사건들의 계열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구조이다. 프랭크는 모든 일의 원인이 사업가인 아버지에게 닥친 경제적 위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그러고나서는 마티처럼 시간의 계열을 뒤흔드는 대신 수표 위조를 통해 경제적 시스템을 교란시킨다. 프랭크의 이러한 여정에 참고가 되는 것은 아버지가 들려준 두 가지 교훈, 즉 크림통에 빠진 두 마리의 쥐 이야기와 복장 혹은 외양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양키즈 팀이 항상 이기는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유니폼 때문이라고.” 사실 이런 충고라면 할리우드의 또 다른 ‘고아’, 팀 버튼의 영화 <에드 우드>에서도 사기꾼 예언가 크리스웰의 입을 통해 이미 말해진 바 있다. “사람들이 내 헛소리를 믿는 건 단지 내가 턱시도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고.” 스필버그를 이야기하면서 팀 버튼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 둘의 영화가 서로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고아의식과 가장(假裝)을 통한 유희- 이들은 모두 미성숙한 사춘기 아이의 망상들이다- 라고 하는 테마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다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아버지의 교훈에 의해 단단히 세례를 받은 프랭크의 여정은 옷을 갈아입음으로써 정체성을 위장하는 것- 조종사, 의사, 그리고 변호사-, 그리고 기꺼이 대중문화적 이미지들- 영화 <007 골드핑거> 및 <Dr. Kildare>와 <Perry Mason> 같은 60년대 TV시리즈물들- 을 참조하면서 타인의 행위를 흉내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이를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것은 이전의 다른 영화들에 대한 스필버그의 다분히 장난스러운 암시이다. 톰 행크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스타 이미지와 그들이 출연한 영화들에 대한 관객의 기억들 또한 그러한 유희를 보강하는 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취하고 있는 인물을 통한 암시의 전략 가운데 가장 이상한 것은, 다름 아니라 프랭크의 어머니 폴라 역을 맡은 나탈리 베이를 통해 스필버그가 느닷없이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영화는 바로 나탈리 베이가 출연한 고다르의 1985년 작품 <탐정>이다. 여기서 그녀는 조종사의 아내 프랑수아즈 역으로 나오는데, 워너라는 이름의 권투매니저와 남편 몰래 관계를 갖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남편은 종종 조종사 복장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조종사를 사칭해 사기행각을 벌인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부정한’ 어머니 폴라 역에 굳이 프랑스 배우 나탈리 베이를 캐스팅하고자 결심하면서 스필버그가 고다르의 이 영화를 떠올렸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간 스필버그를 향해 가해졌던 고다르의 매서운 비난들을 생각한다면 영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심지어 고다르는 근작 <사랑의 찬가>에서도,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던 노부부의 이야기를 구입,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제목의 역사극을 만들고자 하는 제작자의 이름으로 스필버그를 언급한 바 있다. 극단적으로 상이한 위치에 서서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 두 영화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서로의 영화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참으로 흥미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감지되는,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낸 또 하나의 얼룩은 바로 고다르이다(물론 거기다 히치콕을 추가할 수도 있다).
바야흐로 스필버그의 영화는 점점 강박과 히스테리로 얼룩져가고 있지만 스필버그 자신은 여전히 서둘러 그 얼룩을 지우고 서사를 봉합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도 그 흔적은 남는 법이다. 예컨대 플래시백 구조를 통해 60년대 중·후반을 가로지르는 이 영화에서, 프랭크가 ‘이방인의 땅’ 프랑스에서 투옥되어 ‘고행’을 치르고 있었을 시기에 관한 언급은 온데간데없다. 정확히 그 시기는 1968년- 프랑스의 68혁명, 마틴 루터 킹의 암살사건, 닉슨의 대통령 당선 등이 있었던 바로 그해- 이다. 또한 베트남은 프랭크의 아버지가 칼에게 아들의 행적을 감추기 위해 둘러대는 핑곗거리로서만 언급된다. 거의 의도적으로 보일 만큼 스필버그는 교묘하게 역사와 관련된 질문들을 비켜나가면서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온전히 1960년대의 ‘무드’(mood)에 관한 영화로 만든다. 즉 1947년생으로 실존인물 프랭크 애버그네일과 같은 또래인 그가 경험했던 과거의 무드에 관한 재현으로.
또 한번 어김없이 등장하는 스필버그의 이상한 결말 또는 지나치게 큰 마침표. FBI 수사관 칼 핸래티에게 붙잡혀 수감된 프랭크는 결국 칼의 도움으로 자신의 수표 사기 전력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데 바치게 된다. 사실 프랭크는 감옥에 들어가서까지도 자신의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이상의 가장(假裝)은 없지만 역할의 반복이 있다. 프랭크가 칼에게 들려주는 말에 따르면 그가 감옥에서 하는 일은 우편물을 나르는 일인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국세청의 압력에 시달리던 당시에 하고 있던 일- 그가 ‘Postal Service’라고 새겨진 마크가 달린 옷을 입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의 반복이다. 재혼한 어머니의 집에 찾아가 마지막으로 얼룩의 의미를 재차 확인한 프랭크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여정이 시작되게끔 만들었던 아버지에게로 귀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세상을 뜬 진짜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혼한 아내와 딸이 있는 칼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이것이 얼룩의 출현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일까. 스필버그 영화의 결말이 점점 고립되고 단단해질수록 텍스트 전체를 감싸는 불안과 긴장은 더욱 팽팽해지고 있다. 나는 그것이 마침내 완전히 파열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스필버그의 세계에서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아직 라이오스조차 만나지 못했으며 아폴론의 수수께끼 또한 아직 그에게 던져지지 않았다. 하지만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그 유예된 만남이 오히려 더욱 흥미를 돋우는, 진짜배기 스필버그 영화다.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