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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랑하고 싶은 그녀,<피아니스트>
2003-02-04

아가씨 VS 건달

사랑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 말을 굳게 믿는다. 2003년 비가 추적거리는 1월의 어느 주말 코아아트홀에서 <피아니스트>를 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태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걸 확신했고,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그 여자, 피아노를 통해서만 세상에 말을 건넨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 그 여자, 명령하고 부인하고 거부한다. 석고 같은 표정, 굳게 닫힌 입술, 꼭꼭 채워진 코트의 단추, 피아노 건반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듯한 파선의 걸음걸이, 그 어디에도 타인이 틈입할 틈은 없어 보인다. 검고 하얀 두 종류의 직사각형이 빈틈없이 일렬종대로 늘어선 이 권위적인 악기를 두드리면서 그 여자,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건달,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보고 그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다

호기심은 사랑의 나쁜 시작이라고 했다. 그래도 궁금한 건 못 참는다. 모르면 꿈꾸고, 꿈은 뭔가 만든다. 나는 건반으로 꼭꼭 숨겨놓은 그 여자의 성벽 너머를 탐한다.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이 여자,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의 캐릭터인 에이다를 닮아 있다.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기만 해도 내 마음에 공명하는 피아노 같은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여자, 어찌 에이다의 오빠를 더 닮아 있다. 포르노숍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자동차 극장에서 남들의 카섹스를 염탐하며 오르가슴을 느낀다. 김이 팍 새며 환상이 썩은 호박처럼 쭈그러들려는 순간, 이 여자, 부적처럼 고이 감싼 면도칼을 꺼내 자신의 성기를 조금씩 도려낸다. 외과의의 메스는 성냥갑처럼 단정한 근대의 벽돌집을 건축한 일등공신이다. 남근처럼 예민하고 집요하면서도 가차없다. 이 여자, 도대체 어쩌려고 관목처럼 무절제한 자신의 성기를 밤톨처럼 매끄럽게 깎아놓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이 여자는 자웅이 불화하는 기형 동체 같다.

호기심이라는 욕망은 유보를 모른다. 나는 이번엔 그녀의 족보를 탐한다. 이 여자의 침대는 일찍이 정신병원으로 사라진 아버지의 자리에 놓여 있다. 매일 딸과 함께 잠들기를 원했던 엄마는 딸을 남근으로 조각해서 물신으로 숭배한다. 옷을 사는 데서부터 출근 뒤의 동태까지 일거수일투족에 개입한다. 엄마는 “널 위해 내 인생을 희생했는데 돌아오는 결과가 이거냐”며 딸의 독립을 끝없이 두려워한다. 하지만 딸은 안다. 희생당한 것은 엄마의 인생이 아니라 엄마의 욕망 때문에 피아노의 음계에 감금당한 자신의 육체라는 것을. 그래도 딸은 침묵한다. 아제 나이 마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절대고독이 침묵 속에서 공명한다. 엄마가, 엄마가 저럴진대 어디에 가서 살을 풀어놓을 건가! 그녀는 건실한 소녀가장의 자리를 지키겠노라고 엄마에게 울며 고해한다. 살의를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한 남자가 나타난다. 이 남자, 부유하고 젊고 잘생겼다. 눈치도 빨라 석고처럼 푸석하고 엄격한 여자의 얼굴이 다만 소라게의 껍질임을 첫눈에 알아채고 속살을 파먹기 위해 밀물처럼 돌진한다. 슈베르트를 멋부려 연주하는 걸로 선전방송을 시작하더니, ‘목에 키스해도 되나요’라며 미소년의 포즈로 심리전을 펼치다가, 급기야 본부의 독촉 무전을 받고 화장실로 들어간 여자를 쫓아가 육박전을 펼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단숨에 급소를 찔렀다고 생각하고 총검을 뽑는 순간 여자의 몸은 <터미네이터2>의 액체 사이보그처럼 금세 원위치로 봉합되는 게 아닌가. 이 남자, 전기공학도로 저전압으로도 거침없는 전류를 흘려보내는 게 전공인 이십대의 이 남자, 아랫배에 힘 한번 주면 그만인 화장실에서 꽉 막혀버린 변기 때문에 마침내 수컷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는다. 여자는 위로 차원에서 ‘소라게 속살 먹는 법’이란 제목의 기밀문서를 남자에게 전한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속살을 먹으려면 바늘로 장난질하지 말고 손으로 직접 껍질을 깨고 먹을 것.” 남자는 껍질 깨다 손 다칠까 혹은 껍질 깨면 속살 맛 버릴까 싶어 포기한다. 그리고 심통이 나서 흙발로 소라게를 짓이겨버리며 말한다. “넌 사랑을 몰라, 다시는 남자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마.”

여자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엄마의 집에서 나가고 싶었던, 그러나 엄마를 두고 갈 수 없었던 여자는 사랑을 하기 위해 침대 대신 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칼날의 고통을 혼자서 껴안고 싶어했다. 그 고통을 이제 애인이 조금 나누어주었으면 했다. 아! 내 역사를 껴안는 사랑의 의식을 연인과 함께할 수 있다면! 여자는 그런 복잡한 꿈을 꾸었다. 상처와 상처가 내통하고 욕망이 욕망과 연대하여 애완견처럼 귀여운 환상 하나 함께 키우는 그런 사랑 말이다. 남자의 에로스가 피워낸 판타지 속에 여자의 역사는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결국 여자의 칼은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그녀는 자기 안으로 숨을망정 남을 찌르진 못한다. 마조히즘은 그녀의 생존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따뜻하고 열정적이며 정직한 여자의 사랑법이 왜 이다지 낯설게만 보인단 말인가? 그 감독, 참 대단하다.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