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의 영원한 스승, 앙드레 바쟁
임재철 | 영화평론가·<필름컬처> 편집주간 marienbar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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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바쟁이 1958년 한창 활동할 나이인 40살에 이 세상을 떴을때 이 영화비평가가 후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신문이나 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하기는 했지만 그가 생전에
출판한 책이라고는 오슨 웰스에 대한 얄팍한 책 한권뿐이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그의 가르침이 당장 현실화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였던 것이다. 1959년 프랑수아 트뤼포를 시작으로 누벨바그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면서
이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바쟁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바쟁은 영화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범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의 사후인 1958년부터 1962년에 걸쳐 그가 쓴 대표적인 글들이 <영화란 무엇인가>란 네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다시 이중의
절반 정도가 60년대 후반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되면서 그의 비평적인 사고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다. 60년대 이래로 시네필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바쟁을 경유하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되었던 것이다.
앙드레 바쟁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그를 지적으로 성숙하게 만든 환경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의 영화에 대한 관점은 베르그송에서 사르트르에
이르는 20세기 초·중반 프랑스의 지적 변화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지적 환경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바쟁의 글들은 자칫하면 시대착오적인
신비주의로 이해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1918년 앙제에서 태어난 바쟁은 1938년 생클루의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중등학교 교사를 길러내는 이 학교는 여전히 19세기 전통적인 교육방식을
답습하고 있었고 이러한 교육에 질린 학생들은 수업보다는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자신들간의 토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려 했다. 여기서 바쟁은
처음으로 마르셀 레고의 가톨릭적인 급진주의를 만나게 된다. 레고는 물질주의가 날로 힘을 얻어가는 상황에서 종래의 고식적인 종교적 권위로는 전혀
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고 보고 ‘의식의 혁명’을 역설하였다. 그는 개인주의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좀더 유력한 공동체를
수립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로 생각했다.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레고는 결국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남프랑스로 가서 코뮌을
설립하였다. 바쟁은 레고를 따라 코뮌의 일원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 이후로도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에스프리>, 바쟁의 지적 기반
학생 시절 바쟁이 열심히 읽었던 잡지 <에스프리>도 그에게 압도적인 지적 영향을 미쳤을 뿐만아니라 이차대전 이후에는 바쟁 자신이
이 잡지의 정기기고자가 된다. 1932년에 에마누엘 무니에에 의해 창간된 이 잡지는 프랑스의 진보적인 가톨릭계 지식인들의 본산 역할을 했으며
이 잡지의 지적인 경향은 나중에 사인주의(Personalism)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이 흐름의 리더격인 무니에는 사인주의가 ‘체계의 철학’과
유아론 사이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거대한 도식에 의해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의 흐름 즉 헤겔이나 마르크스적인 철학에 명백히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체나 하이데거 그리고 초기의 사르트르에서 보는 것과 같은 ‘타인에 대한 깊은 혐오감’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계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은 때로는 극히 매혹적인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실천적인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입장인 것이다. 무니에는 삶의 모호성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행동을 통해서 그 의미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래의 프랑스사회를
지배하던 교육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위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던 바쟁은 무니에의 이러한 입장에 곧 깊게 공명하면서 <에스프리>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을 뿐만아니라 동료 학생들과 ‘<에스프리> 연구모임’을 만들어 급기야는 그 모임에 무니에를 직접 초청하는 열성을
보였던 것이다.
<에스프리>의 기고자 중 특히 바쟁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로제 레엔하르트였다. 애초에 이 잡지에 정치 관련 기사를
쓰던 레엔하르트는 1934년부터 영화에 관한 평을 쓰기 시작했다. 30년대에 프랑스에서 쓰여진 가장 뛰어난 영화글이라 평가받는 레엔하르트의
영화평은 아직 영화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바쟁에게 영화가 중요한 문화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인식하게 해주었다. 또
레엔하르트는 자신의 영화 칼럼에서 나중에 바쟁이 좀더 정교화하게 되는 리얼리즘적인 영화관을 피력한다. 그는 토키영화의 도래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과는 달리 이것이 영화가 좀더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영화적 테크닉을
현란하게 사용하는 것을 극히 혐오했다. 테크닉이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것은 영화의 본질을 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현실에 마주해서 그에 대해 좀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있는 현실을 충실히 기록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레엔하르트는 나중에 직접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고다르의 <결혼한 여자>에 출연해 지식인에게 타협이란
것이 결코 비굴한 것이 아님을 역설하기도 한다.
1939년 후반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면서 프랑스에도 전국적인 소집령이 내려지고 바쟁은 보르도의 병영에 들어가게 된다. 병영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가장 친한 친구로 남은 기 레제를 만난 것이 바쟁의 본격적인 영화 입문에 중대한 계기가 된다. 레제는 틈만 나면 바쟁을 데리고 극장에 드나들었던
것이다. 레제의 집안은 극장체인을 소유하고 있어서 무료입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영화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었던 바쟁은 보고난 영화에 대해
레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몸이 약했던 바쟁은 장교임용에서 탈락, 결국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곧 이어 전쟁이 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한다. 바쟁은 점령기를 전부터 알고 지내던 연극평론가 피에르 에메
투샤르가 주재하던 ‘메종 드 레트르’에서 문학 토론모임 등에 참여하면서 보낸다. 이 단체는 문학뿐아니라 연극,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토론모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아직 영화에 대한 모임은 없었다. 이것에 착안한 바쟁은 여기서 영화모임을 만들기로 마음을 먹고 역시 상당한 영화광이었던
장 피에르 샤르티에의 도움을 얻어 시네클럽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 큰 문제는 상영할 필름을 구하는 것이었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예전의 많은 필름들은 점령군에게 압수된 상태였고 당시 파리의 극장가를 장식하던 프로파간다적인 독일영화, 리얼리티가 없는 프랑스영화를 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쟁은 카메라 가게를 통해 개인 수집가들로부터 필름을 빌리거나 암시장에서 필름을 사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 모임을 꾸려나갔다.
특히 이 시기에 필름을 조달하는 데 알랭 레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독일 표현주의영화에 깊이 심취해 있던 레네는 바쟁의
시네클럽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프리츠 랑이나 파브스트의 필름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바쟁의 시네클럽은 당시 새로운 문화를 전혀 접할 수 없었던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끌어 사르트르와 보봐르 같은 사람들이 관객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상영 뒤에는 항상 토론을 가짐으로써 바쟁
자신의 영화에 대한 이해도도 날로 향상하게 된다. 레네도 처음에는 자신보다 훨씬 영화에 대해 몰랐던 바쟁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게 영화를 해석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바쟁은 서서히 ‘영화의 사람’이 돼갔던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지문”
그럼 여기서 바쟁의 영화에 대한 사고의 핵심을 추출해보기로 하자. 바쟁의 대표적인 글들을 모아 사후에 출간된 <영화란 무엇인가>의
맨 앞에 실린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은 모든 조형예술의 뿌리에 ‘미이라 콤플렉스’가 있음을 지적한다. 회화나 조각은 인물이나 대상의 특징을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그들이 소멸한 뒤에도 그것이 전해지도록 하고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욕구라는 것이다. 사진은 이러한 불멸에의 욕구를 완벽하게 채워주는 매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지금껏 존재했던 어떤 매체보다 대상에
대한 가장 완벽한 유사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유사성에는 바로 ‘인간적인 터치’가 완전히 배제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예술이 인간의 현존에 의지함에 비해 오직 사진에서만이 그것의 부재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는 바쟁의 말대로 그것은 외계의
대상을 그 완벽한 객관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어서 거의 자연현상에 비견할 만한 것이 된다. 종래의 조형예술에서 사진의 객관성은 그리하여
“완성이자 해방”의 의미를 띠게 된다. 현실을 모사하고자 하는 욕구를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완성이라 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모사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해방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사진의 객관성에 시간의 차원을 부가시킴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모사하고자 하는 욕구의 최종적인 형태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외부 세계를 그 시간적 지속에서 포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와 외부의 현실 즉 실재는 아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외부 세계를 재현할 수 있는 여러 매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실재와 일종의 ‘존재론적 연관관계’라는 끈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바쟁에게 영화는 외부세계 자체는 아니지만 외부세계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나아가서 그 자체가 외부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바쟁은 영화를 일컬어 현실의 ‘점근선’, 혹은 ‘지문’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영화가 현실과 맺고 있는 이 존재론적인 끈은 바쟁에 의하면 그것이 현실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를 보면 잘 입증된다. 영화에서 형성된 이미지가
현실에 스며들게 되면 그 현실은 다시 그 이미지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든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바쟁은 전쟁르포영화에 대해 논하면서
바로 르포영화의 영향으로 인해 전쟁의 성격 자체가 변모하게 됨을 암시한다. 영화 속의 군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뿐아니라 영화에 담겨진다는
목적 자체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전쟁은 “역사이자 동시에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이차대전 전후의 채플린과 히틀러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이미지와 현실의 상호관계가 드러나고 있다. 순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의 본질은 잘 드러나고 있다.
현실 그 자체를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에 무한히 접근하는 것으로서의 영화. 이러한 ‘영화의 힘’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것이 한계적이라고
할 만한 상황을 담아낼 때이다. 바로 여기서 바쟁의 ‘금지된 몽타주’의 테제가 도출되며 또한 모험영화 혹은 탐험영화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이
나오게 된다. 둘 이상의 요인이 동시에 제시될 때는 가급적 나눠찍기 즉 몽타주는 배제해야 한다는 이 원칙은 사건의 공간적 단일성을 그대로 유지해야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바쟁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모험영화는 그것이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는 상황 즉 일회성에 의해 진실성이 보증된다.
그러므로 모험 혹은 탐험을 사후적으로 그럴듯하게 재구성한 영화들은 그 빈틈없음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일회적인 성격 자체가 여기서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재구성 가능한 것이 되므로 평범한 스펙터클 이상이 되지 못한다.
바쟁이 <콘티키 표류기> 같은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영화에서는 영화를 찍는 것이 탐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어서 완성된 영화는 참으로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바로 이러한 불완전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성을 보증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영화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핀트가 맞지 않는 거친 화면은 우리에게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의 급박성을 끊임없이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풍을 만났다거나 하는 것 같은, 그 모험에 있어서 가장 위급한 상황들이
영화 속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는 현실의
거친 숨결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게 되고 급기야는 영화가 아닌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현실의 유동성을 포착하라
확실히 바쟁은 영화가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우리의 의식을 크게 고양시켜주었을 뿐아니라 무엇보다도 ‘현실의 모호성’을 그대로 담아낼수 있는 영화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주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것이 잘 재단된 현실이라면 그것은 이미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쟁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현실의 유동성을 영화만큼 잘 포착할 수 있는 매체가 없다는 것을 그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현실의
깊은 모호성에 대한 그의 집착은 확실히 그에게 절대적인 혹은 도그마틱한 사고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는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의 섬세한 상대주의에서 바쟁이 전전 프랑스영화의 최고의 지점을 발견한 것도 그렇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에게 희유한 감정이입의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대목 때문이다. 결코 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생각을 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보려는 그런 능력말이다. 더들리 앤드루가 자신의 바쟁 평전에서 소상히 전하고 있는
대로 그의 기벽 중 하나였던 동물에 대한 과도한 애정도 바로 이러한 감정이입의 능력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거의 자신의 집을 ‘작은
동물원’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종 동물들로 채워놓았으며 심지어는 악어를 욕조에서 기른 적도 있다고 한다. 바쟁의 처사에 기겁을 한
그의 아내 자닌느는 나중에 이 악어를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21세기에 사유하는 바쟁의 흔적
앞에서 바쟁이 누벨바그의 ‘정신적 지주’로서 주목받았다고 했지만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은 누벨바그의 감독들이 결코 바쟁적인 유산을 직접적으로
이어받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바쟁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이어받았다면 오늘날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누벨바그는 도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바쟁적인 것들에 과감히 반기를 들면서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가톨릭적인
교양주의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바쟁의 입장에 맞서 이 젊은 비평가들은 작가 및 스타일의 절대적인 우위를 내세웠다. 그리하여 트뤼포를 중심으로
한 히치콕과 혹스에 대한 열광을 앞에 두고 바쟁은 적지 않은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심지어 ‘작가주의’라는 잣대로 웰스의 <아카딘씨>를
<시민케인>보다 더 나은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식으로까지 나아가자 바쟁은 “작가라는 것 자체는 좋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작가인가”라고 반문했던 것이다. 바쟁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작가 못지않게 작품도, 그리고 스타일 못지않게 주제도 중요한 것이었던 것이다.
대중문화의 격랑을 이미 겪은 오늘날의 지점에서 바쟁의 사고에 일종의 플라톤주의가 숨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실을
절대시하는 그의 사고에서 일종의 신비주의를 읽어내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란 매체에 대한 매혹을 생각하는 데 있어 바쟁이 보여준
‘세속화된 초월론’은 역시 쉽게 저버리기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극히 범속한 것을 화면에서 봄에도 우리는 때로는 그것이 숭고한 체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확실히 80년대 이후에 여기저기에서 바쟁적인 사고의 흔적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가
‘영화의 가톨릭성’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고다르가 자신의 <영화사>에서 ‘이미지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바쟁적인 것들이
그 배경에 있다는 것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이미지의 독자성을 사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바쟁은 중요한 원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