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현장]영화 <천년호> 중국 로케
2003-01-13

11일 밤 중국 남동부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서쪽으로 60여㎞ 떨어진 린안(臨安) 근교의 울창한 숲. 잎을 모두 떨군 은회색의 수삼(水杉)나무가 빽빽이 들어찬데다 밤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당장이라도 구미호가 튀어나올 듯한 귀기(鬼氣)가 흐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소복 차림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인 하나가 두세 길 높이에서 허공을 가르며 스쳐지나간다. 이를 본 사람들은 혼비백산하기는커녕 비명 대신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쳐댄다.

이곳은 영화 <천년호(千年湖)>(제작 한맥영화)의 중국 야외 로케장. 한국과 중국, 그리고 홍콩 스태프 150여명이 밤도 잊은 채 분주히 오가며 촬영에 한창이다.

리허설이 끝나고 “안징(安靜)!”이란 메가폰 소리가 흘러나오자 연기자와 스태프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감돈다. 이어 “준베이(準備) 이, 얼, 싼!” 하는 구호와 함께 자운비(김효진)의 몸을 빌려 요귀로 환생한 아우타의 원혼이 천년의 한이 서린 천년호를 향해 날아가고 자운비의 연인이자 신라의 간성(干城)인 비하랑 장군(정준호)이 말을 타고 힘겹게 뒤쫓는다.

비하랑을 태운 말이 동선을 벗어나고 카메라의 위치가 맞지 않는 등 몇 차례의 NG가 거듭된 뒤 비로소 이광훈 감독의 OK사인이 떨어졌다. 메가폰을 든 조감독이 들뜬 목소리로 “쿠얼라(過了)!”하고 외친다. 89신의 두번째 커트가 조명과 카메라를 설치한 지 세 시간여 만에 완성된 것이다. 곧이어 스태프들은 다음 장면 촬영 준비에 나서고 연기자들은 지친 몸을 잠시 추스른다.

<천년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 대로 기운 9세기 말 진성여왕 시대를 배경으로 자운비ㆍ비하랑ㆍ진성여왕(김혜리)의 엇갈린 사랑과 천년사직의 미스터리를 교직한 무협 팬터지 멜로물. 60년대 신상옥 감독의 <백발마녀전>을 뼈대로 삼아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과 초대형 액션 장면 등으로 새 살을 입혔다.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으로는 <두사부일체>와 <가문의 영광> 두 편으로 1천만명을 극장으로 불러모은 흥행배우 정준호, TV사극 전문 탤런트에서 역사영화로 보폭을 넓힌 김혜리, 신세대의 아이콘이 된 CF스타 김효진이 나섰다.

이날 촬영된 장면은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신라 건국의 비밀, 여왕의 질투, 조정의 음모, 자운비의 진실 등이 낱낱이 드러나기 직전의 상황이다. 여왕은 시위대원을 이끌고 자운비와 비하랑을 따라와 천년호에서 나라의 존망과 천년의 사랑을 건 전투를 벌인다.

이광훈 감독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비극적 운명에 초점을 맞췄다”면서 “외형적 볼거리로 포장만 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탄탄하게 구성해 관객이 줄거리에 푹 빠져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한국영화가 중국을 무대로 촬영에 나선 것은 <아나키스트> <비천무> <무사>에 이어 네번째. 처음으로 합작이 아닌 협작을 택했고 스태프들도 국영 스튜디오 겸 제작사 격인 제편창(製片廠)을 통하지 않고 개별 계약을 맺었다.

합작인 경우에는 중국배우를 반드시 써야 하는데다(<비천무>나 <아나키스트> 때는 한국배우와 중국배우를 더블 캐스팅해 두 번씩 찍었고 <무사>에서는 장쯔이가 출연했다) 필요없는 인력까지 포함돼 비용과 시간이 더 든다. 중국에서 개봉하지 않을 바에야 엄격한 중국의 심의기준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신라가 무대인 이 영화를 굳이 중국에 건너와 찍고 있는 까닭은 전봇대나 고압선이 카메라 파인더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빼어난 풍광을 간직한 곳을 국내에서 찾기 어려웠고 신라의 분위기와 흡사한 당나라 양식의 왕궁 세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과 <트라이어드>에서 장이머우 감독의 파트너로 호흡을 맞춘 루웨(呂樂) 촬영감독과 <더 원>과 <키스 오브 드래곤>의 위안더(元德) 무술감독 등 세계적인 베테랑 스태프들의 합류도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지난해 10월 10일 크랭크인한 지 한 달 가량은 의사소통이 안돼 서로 답답해했으나 이제는 말단 스태프와 엑스트라까지 “조용”과 “안징”, “레디”와 “준베이”, “쿠얼라”와 OK등 3개국어가 뒤섞인 메가폰 소리를 척척 알아듣는다.

<천년호> 제작진은 2월 중순경 중국 로케를 마치고 수중장면 보충촬영과 녹음ㆍ편집 등을 거친 뒤 7월 극장가에 간판을 내걸 예정이다.

(항저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