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그리고 10년 뒤, 베테랑이 된 클라리스 스탈링 요원은 마약범 소탕 작전을 지휘하게 된다. 잠복중이던 스탈링은 마약범이 아기를 안고 소굴에서 나오자 급히 작전을 취소한다. 그러나 다른 기관에서 나온 요원들이 그의 명령을 무시한 채 총격전을 시작하고, 스탈링은 기관총을 한손에 들고 저항하는 마약범을 죽인다. 아무리 범죄자라지만 아이를 안은 여자를 살해했다는 비난으로 곤경에 처한 스탈링에게, 두개의 전갈이 온다. 하나는 10년 전 경찰관 3명을 죽이고 사라진 뒤 종적을 감춘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 그는 스탈링을 위로하며, 자신이 은둔생활에 지쳤음을 비친다. 다른 하나는 한니발의 4번째 희생자이자 유일한 생존자 메이슨이다. 한니발이 준 환각제에 취하여 자기 얼굴의 살점을 떼내 개에게 주었던 메이슨은, 현상금을 내걸고 법무성에 압력을 넣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며 한니발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다. 그러나 플로렌스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니발은 경찰과 메이슨의 부하를 살해하고 다시 사라진다. 눈앞에서 한니발을 놓친 메이슨은 함정을 판다. 한니발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스탈링을 난국에 빠트리면, 반드시 한니발이 그의 곁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Review
시종일관 피와 살점이 튀는 공포영화 <양들의 침묵>에 작품상, 감독상, 주연상 등 아카데미상의 주요 부문을 몰아준 것은, 놀랍지만 당연한 선택이었다. <양들의 침묵>은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영화였다. 원작은 <레드 드래건>에서 시작하여 <한니발>로 끝나는 3부작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한니발이라는 영화사상 전무후무할 매력적인 ‘살인마’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 조너선 드미의 연출력과 앤서니 홉킨스, 조디 포스터의 조화는 정확하게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었다. <양들의 침묵>은 각자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내며, 모든 면에서 정점에 오른 걸작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제작자인 디노 디 로렌티스는 <양들의 침묵>이 성공을 거둔 뒤, 토머스 해리스가 쓸 한니발 렉터 박사의 속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이 출간된 것은 99년 7월. 무려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소설 속의 시간도 10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한니발의 재림을 기다린 사람은, 아쉽게도 앤서니 홉킨스뿐이었다. 조너선 드미는 속편의 감독을 거절했고, 설상가상으로 조디 포스터도 고사했다. 게다가 <한니발>의 원작은 그리 평이 좋지 않았다. 이리저리 표류하던 <한니발>은 다행히 <글라디에이터>로 재기한 리들리 스콧의 손에 들어갔고, 줄리언 무어가 스탈링 역을 수락했다. <양들의 침묵>의 재현은 아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가능케 하는 A급 진용을 갖추게 된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10년 뒤에 일어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실제로 10년 뒤에 쓰여졌고, 그래서 전작과는 완전히 별개라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실이 좋았다”는 리들리 스콧의 말처럼, <한니발>은 전작을 보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데이비드 마멧에 이어 <쉰들러 리스트>의 스티븐 자일리언이 다듬은 시나리오는 중심인물의 하나였던 메이슨의 여동생을 빼고 동성애 코드를 약화하는 등 소설보다 빠르게 이야기를 긴박하게 진행하고, 다양한 액션장면들을 추가했다. 특히 한니발이 은거하던 플로렌스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추격전을 풍성하게 강조했다. 안팎으로 시달리다 한니발의 현상금으로 한몫 챙기려는 파치 경감의 캐릭터도 원작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다. 소설의 결말과 다르게 처리한 마지막 장면은 기대에 못 미친다.
이미 걸작으로 등재된 다른 감독의 작품에 이어지는 속편을 만든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담되는 일이다. 리들리 스콧은 시리즈물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에이리언>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속편을 만든 적이 없다. 리들리 스콧의 첫 속편인 <한니발>은 우려처럼 <양들의 침묵>을 능가하지 못한다. 캐릭터의 구축이나 매혹적인 악마의 낭만적인 모험으로 관객을 끌어가는 놀라운 리듬과 구성력, 심지어 리들리 스콧의 장기인 현란한 이미지까지도 전작을 따르지 못한다. 빛과 그림자가 격렬하게 부딪치는 극단적인 장면의 묘사는, 리들리 스콧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블레이드 러너> <블랙 레인> <위험한 연인> 등에서 보여준 리들리 스콧의 테크닉은 분명 거장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익숙한 ‘쫓고 쫓기기’의 게임에만 열중한다. <한니발>은 유려한 리듬과 인상적인 장면들로 전개되던 플로렌스를 벗어나자, 같은 길을 맴돈다. <한니발>에서 가장 매혹적인 이미지는, 한 인물이나 스토리에 얽매이지 않는 오프닝 크레디트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한니발’이라는 캐릭터가 전작만큼 매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니발 렉터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우리를 겁나게 하는 동시에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의 모든 주요 악마들이 가진 것처럼,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지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니발 렉터의 매력은 다른 중요한 악마들보다 덜 신비적인 것에 있다. 그는 존재하고, 우리의 삶에서 같이 호흡하기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한니발>은 그렇지 않다. 사랑의 감정보다 농밀하게 스탈링과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던 한니발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예술작품’ 혹은 ‘일품요리’를 만드는 데 고심하는 장인이 등장할 뿐이다. <한니발>은 <양들의 침묵>의 산맥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김봉석 기자 lotus@hani.co.kr
10년의 세월, 깊어진 연기 I <한니발>의 배우들
전작이 그랬듯이, <한니발>도 배우들의 연기가 맛을 더한다. 앤서니 홉킨스는 여전하다. 너무 여전해서, 오히려 무감각해질 정도다. 스탈링을 초대하여 뇌를 파먹는 만찬을 하다가 승강이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한니발은 내면의 악마를 힐끗힐끗 놓아버린다. 스탈링에 대한 연정과 내부의 악마성이 얼핏얼핏 스치며 교차되는 연기는 탁월하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매혹적인 악마 한니발의 캐릭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악마는 역시 영원불멸인가? <부기 나이트> 등 아카데미상 후보에 두번이나 오른 줄리언 무어의 연기력은 이미 검증되었다. <한니발>의 10년의 세월을 먹은 스탈링도 훨씬 안정되었다. 내면의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완고한 윤리관을 지닌 스탈링 역에 줄리언 무어말고 다른 배우를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심지어 <양들의 침묵>의 장면을 떠올릴 때도, 줄리언 무어의 얼굴이 박혀있을 정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스탈링의 한니발에 대한 감정이 원작과는 약간 다르게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링이 한니발에 대해 느끼는 이중적인 감정은 제대로 표면에 부상하지 않는다. 그 덕에 한니발과 스탈링의 관계는 전작보다 모호해졌다.뜯겨나간 얼굴을 얼기설기 꿰매놓은 메이슨 역을 연기한 게리 올드먼은, 얼굴 대신 목소리로 연기한다. 메이슨의 육체는 성한 부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몸으로 연기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바람이 새나가는 탁한 목소리로 한니발에 대한 증오심을 피력하는 모습은 진풍경이다. <좋은 친구들>에서, 갱이면서도 ‘선함’을 결코 잃지 않았던 레이 리요타는 부패한 법무성 관리 폴 크렌들러를 맡았다. 출연작마다 ‘선함’과 ‘악함’을 자유자재로 보여주었던 레이 리요타는 <한니발>에서, 가장 야비한 인물이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준다. 심지어 그의 치졸한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아마도 영화 사상 가장 ‘사실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