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기자인 레이첼(나오미 왓츠)은 조카인 케이티의 죽음에 의문을 갖는다. 케이티가 죽은 바로 그 시간에 남자친구가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고, 다른 남녀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저주받은 비디오를 봤기 때문이라는 말이 주변의 친구들 사이에 떠돌고 있다. 레이첼은 일주일 전 케이티와 친구들이 묵었다는 쉘터 산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비디오를 보게 된다. 사다리, 거울,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여인 등의 악몽 같은 이미지들이 나타나는 비디오가 끝나자 어디에선가 전화가 걸려온다. 소름끼치는 목소리는 ‘일주일’이라고 말한다. 레이첼은 한때 애인이었던 사진작가 노아(마틴 헨더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일주일 동안 저주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다닌다. 단 하나뿐인 아들 에이단(데이비드 도프먼)까지 비디오를 보았기 때문에, 레이첼이 저주를 풀지 못하면 아들까지 죽어야 하는 것이다.
■ Review
<링>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영화 <링>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리메이크작이 만들어졌고, 흥행에서도 꽤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원작의 공포는 전혀 살려내지 못한 졸작이었지만. 할리우드에서 <링>을 만든 고어 버빈스키는 공포와 상관없는 코믹한 영화 <마우스 헌트>와 <멕시칸>을 만든 감독이다. 특수효과를 이용하여 인간과 쥐가 벌이는 대소동을 그린 <마우스 헌트>나 브래드 피트와 줄리아 로버츠 등 톱스타를 기용하여 말끔한 드라마를 뽑아내고 멕시코의 이국적인 풍경을 유려한 배경으로 깐 솜씨는 <링>이라는 공포영화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동양적인 공포에 할리우드적인 감성을 적절하게 섞었고, 두려움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눈에 띈다.
일본판 <링>은 죽은 여인의 원한이 산 사람을 괴롭히는 이야기다. 감독인 나카다 히데오는 죽음을 예감한 여인이 절박하게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만을 그려낸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서운 장면이 너무 없어 지루할 정도다. 섬뜩함보다는 제한된 시간의 초조함, 불안감 같은 것들이 더욱 강조된다. 하지만 사다코가 기어나오는 마지막 한 장면으로 <링>의 공포는 순식간에 극한까지 이르렀다.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 장면을 직접 만들어냄으로써 <링>은 결정타를 날린 것이다.
할리우드판 <링>에서 마지막 장면의 위력은 한없이 떨어진다. 수십만명에 이르는 한국 관객은 이미 그 장면을 보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북미 관객이 대부분 <오픈 유어 아이즈>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리메이크작인 <바닐라 스카이>를 거의 동일하게 모사한 카메론 크로와 달리, 다행히 고어 버빈스키는 <링>에 할리우드의 감성을 충실하게 접목시킨다. ‘전화 걸다’란 ‘링’의 또 하나의 의미에 맞추어 비디오를 본 사람들에게 걸려와 죽음을 예고하는 전화는 가장 쉬운 서구적 설정이다. <링>은 죽음 이전에 수많은 ‘사인’들을 보여주면서 ‘징조’에 익숙한 서구 관객들을 자극한다. 피가 흘러나오는 전화기,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파리, 검은색의 낙서, 손목의 붉은 상처 등 계속해서 사인이 나타나 레이첼을 괴롭힌다. 성경에는 종말이 찾아오기 전 ‘사인’, 즉 징조가 나타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징조를 통해서 종말의 도래를 알게 된다. 별다른 징조없이 죽음을 예감하는 레이코와 류지와는 달리, 레이첼과 노아에게는 징조가 필요하다. 죽음을 믿지 않던 노아는 구체적인 ‘사인’을 본 뒤에야 논리적으로 믿게 된다. 그들은 본 뒤에야 비로소 믿게 되는 것이다.
(왼쪽부터 차례로)♣ 레이첼은 노아에게 `죽음의` 비디오테이프를 건네준다. 죽음을 향한 1주일간의 시간게임에 동반자가 생긴 셈이다.♣ 비디오테이프의 첫 장면은 으스스한 소용돌이이다. 이 화면의 의미는?♣ 비디오테이프의 비밀을 풀기 위해 레이첼은 사마라가 살았던 섬으로 찾아간다.♣ 마침내 레이첼은 우물안에서 사마라의 시체를 찾아내고, 그녀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성인이었던 사다코를 아이인 사마라로 바꾼 것도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이다. 서구에서는 흔히 아이들을 비이성적인 존재로 여기고, 일종의 두려움까지 갖는다. <링>에 등장하는 두 아이는 모두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에이단은 비디오를 보기 전부터 레이첼의 죽음을 감지하고 있고, 비디오를 본 뒤에는 사마라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결코 잠들지 않음도 알고 있다. 반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마라 때문이라고 생각한 부모로 인해 세상에서 격리되고, 결국은 원한을 갖게 되는 사마라의 저주의 근원은 가족이다. 반면 일본판 <링>의 출발점은 사회와의 갈등이다. 어릴 때부터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괴물이라고 불렸던 아픈 과거를 지닌 여인 사다코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세상의 박해를 받았고 마침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링>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될 수 있었던 이유를, 원작자인 스즈키 고지는 ‘보편적인 공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디오에 저주가 담긴 것은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냥 무조건적인 저주가 아니라, 철저하게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저주와 공포라는 것이다. <링>은 철저하게 미스터리 형식으로 사건을 풀어가면서 공포를 안겨준다. 할리우드판 <링>은 단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보여주기’를 택한다. 희생자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 사마라의 물에 불은 얼굴도 보여주고 많은 징조들을 통하여 충격효과를 마다하지 않는다. 게다가 친구와 함께 있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대가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소녀라든가, 거울에 비친 여인의 이미지 같은 <라센>과 <링2> 등 속편에 나온 장면들을 과감하게 끌어들이기도 한다. <링>은 보여주는 공포를 택했고, 세트와 촬영 등에 많은 신경을 썼다. 에이단이 그리는 그림, 사마라가 있던 마구간 다락방의 모습, 우물 주변의 풍경 등 인상적인 볼거리가 눈에 띈다. 고어 버빈스키는 일본판 <링>과는 다르게 할리우드판 <링>의 영상을 차가운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할리우드판 <링>은 동일한 공포를 동과 서가 어떤 방식으로 그려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판이 직감과 정서에 의존한다면, 할리우드판은 분석과 사인 이를테면 증거에 의존한다. <링>은 그냥 보아도 꽤 재미있지만, 일본판을 떠올리면서 본다면 더욱 흥미롭다.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