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한해가 가고 다른 한해가 온다. 대통령도 새로이 뽑혔고 새 시대가 열릴 것 같기도 한 2003년, 마음 같아서는 뜻깊게 새해를 맞이하고 싶기도 하지만 역시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선물보따리처럼 안겨진 새해 휴일을 그 신물나는 TV와 함께 뒹굴면서 새우깡 먹듯 보내기 일쑤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겨냥해서인지 명절 때가 되면 TV에서는 ‘특선’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영화를 틀어준다. 특선외화, 아니면 특선방화.
또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어느 명절에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해주었던 적도 있다. 롭 라이너 감독의 1989년작인 이 로맨틱코미디 영화는 한때 많은 팬들을 지니고 있던 영화다. 멕 라이언과 빌리 크리스털의 따뜻한 연기도 좋았지만 해리 코닉 주니어가 맡아 했던 재즈풍의 영화음악이 분위기를 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영화이기도 하다. 아마도 지난 15년 동안 크게 성공한 영화 O.S.T 목록을 꼽으라고 했을 때 이 O.S.T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It Had to Be You>를 비롯, 대중적으로 빅히트를 기록한 곡들이 이 O.S.T에 수두록하게 실려 있다. 영화음악의 중추를 담당했던 해리 코닉 주니어는 뉴 올리언스 출신이다. ‘재즈의 지세’가 너무도 강한 이 땅에서 태어난 해리 코닉 주니어 역시 정통 재즈의 자장에 철저하게 포획된 음악 스타일을 구사한다. 무시 못할 탄탄한 피아노 실력을 지닌 그는 이른바 ‘스트라이드’ 주법을 쓰는 전형적인 피아니스트 가운데 하나. 왼손의 주기적인 옥타브 연주에 의해 리듬감과 힘을 동시에 부여받는 이 스타일은 재즈의 발생 때부터 젤리 롤 모튼처럼 뉴 올리언스에서 활약한 뮤지션의 손에 의해 전통이 닦인 그야말로 ‘전통’ 주법이다. <해리…> O.S.T에서도 이와 같은 주법을 잘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어딘지 약간 느끼한 데가 있는, 그래서 미국적인 스탠더드 재즈 보컬리스트의 정통성을 이어받고 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프랑크 시나트라나 토니 베넷 같은 가수들보다는 쿨쪽에 더 가깝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의 내한공연을 본 다음부터는 ‘느끼한’ 쪽에 더 무게가 부여되는 걸 느꼈지만 어쨌든 그의 목소리는 적어도 녹음된 것만으로 본다면 쳇 베이커 풍의 드라이한 느낌이 가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가을 느낌의 영화이긴 하나, 연휴나 명절, 연말연시에는 이처럼 따뜻하고 일상적인 영화들이 최근 들어 많이 TV 전파를 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조금 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왜 꼭 명절 때가 되면 <빠삐용>을 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카카오 부대를 타고 빠삐용이 바다 멀리 사라지는 장면에서 흐르던 테마음악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또, 음… <대탈주>도 유독 많이 등장했던 타이틀이다. 독재정권 시절에 왜 그리 ‘탈출’영화들을 명절 때마다 보여주었는지 참. <닥터 지바고>도 자주 등장하던 레퍼토리의 하나가 아닐까. 어떤 명절에는 <남과 여>를 해주었던 기억도 있다. <카사블랑카>도 어느 명절엔가 보았다. 아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벤허>…. 어쨌거나 ‘명절 TV명화’라는 장르를 새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명절영화에도 흐름이 있고 법칙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