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가 내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독자들이 이 글을 읽게 될 시점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이 글이 실린 <씨네21>이 가판대에 꽂혀 있을 즈음엔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이 누구인지 판가름나고도 며칠이 지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 대선 결과를 보고 나서 그 느낌의 한 자락을 이 글에 버무려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금요일 아침까지만 글을 넘기면 되니,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그것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대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나는 그뒤 며칠 동안 아무 일도 못할 것 같다. 너무 떠 있거나 너무 가라앉아서. 심리적 불능은 결국 물리적 불능이다. 내 이런 선거 히스테리는 무엇보다도 내가 못난 탓이겠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못난 탓도 있을 터이다.
이란 감독이라는 버박 파여미의 <비밀투표>를 봤다. 파여미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터라 <씨네21>의 인터넷사이트에 들어가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봤는데, 사진만 하나 덜렁 올라와 있을 뿐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래도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남자라는 것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한자 이름이나 유럽어 계통 이름이 아니면 성별도 가늠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동아시아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비밀투표>는 이란의 한 후미진 마을의 선거일 풍경을 그리고 있다. 도시에서 온 여성 선거관리 요원이 한 군인의 경호를 받으며 그 마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투표를 받으러 다닌다는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투표는 추첨과 함께 대표자를 뽑는 두 가지 ‘민주적’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수년 전에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나이는 비밀투표를 통한 보통선거 제도로는 관료주의와 권력집중을 막을 수 없다며,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에 우연성을 부과하는 추첨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가라타니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나는 거기 동의하지 않지만), 직접 비밀 평등 보통선거는 대부분의 인류사회에 이제 깊이 뿌리내려 그것을 추첨제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다.
흔히 지적되는 일이지만, 제3세계 사람들은 제1세계에 대해서보다 같은 제3세계에 대해서 더 모른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도 제1세계 저널리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접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휘어져 있기 십상이다. 나 역시 그렇다. 옛 페르시아에 대해서든 지금의 이란에 대해서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칙칙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 혁명으로 끝장난 팔레비 왕조의 이미지만 칙칙한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의 이슬람 공화국 이미지도 칙칙하다. 광신에 가까운 종교적 열정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신정체제, 차도르로 상징되는 성적 순결주의 같은 것 정도가 내가 이란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미지다. 그래서, <비밀투표>를 보며 나는 여러 번 놀랐다. 첫 번째 놀라움은 어, 이란에도 자유로운 선거가 있네, 하는 경박한 놀라움이었다. 두 번째는 어, 선거관리 요원이 여성이라니, 하는 덜떨어진 놀라움이었다. 마지막은, 어, 이란에서는 16살부터 선거권이 있네, 하는 진지한 놀라움이었다. 우리는 스무살이 넘어야 선거권을 얻는다. 선거권을 얻는 나이의 높낮이만으로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나이에서도 제한을 줄이는 것이 보통선거나 민주주의의 이상에 더 가깝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신분 교육 재산 인종 신앙 성별 따위를 기준으로 삼은 자격 요건의 제한없이 일정한 나이에 이른 시민 모두가 자신들을 대표할 공직자를 뽑는 보통선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야 보편화한 제도다.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 시민 민주주의가 활짝 꽃핀 서구사회에서도, 오래도록 선거권은 재산과 교양을 지닌 백인 남성들만의 몫이었다. 혁명의 물결이 유럽 전체를 휩쓸던 1848년, 영국 노동자들은 570만명의 청원 서명과 시위 파업으로 의회를 압박하고도 선거권을 얻지 못했다. 영국 지배계급은 차티스트라고 불리던 제 나라 노동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 거기 응답했을 뿐이다. 스위스 여성은 제 나라 남성과 동일한 참정권을 얻기 위해 197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국인들이 1948년에 보통선거 제도를 얻은 것은 말도 피부빛깔도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의 열매를 거저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일(이 아니라 며칠 전이겠지만) 선거에서 우리가 행사할(이 아니라 행사한이겠지만) 표 하나하나에는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이방인들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다. 거기에는 또, 우리가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없었던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싸우다 갇히고 고문당하고 살해된 수많은 동포들의 피와 눈물도 배어 있다. 그 피와 눈물은 <비밀투표>의 등장인물들이 행사하는 표에도 배어 있을 것이다. 문명의 모든 요소들이 그렇듯, 혁명도 국경을 넘어 퍼져나간다. 좋은 일이다. 지면이 다 돼 서둘러 마무리하자면, <비밀투표>는 잔잔한 웃음을 유발하는, 잘 익은 영화다.고종석/ 자유기고가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