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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감있는 개혁이 요동한다 ‘독립영화’
2002-12-24

지난 20일부터 2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와 미로스페이스에서 ‘충돌’을 내건 ‘서울독립영화제 2002’(집행위원장 조영각)가 열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이효인씨가 이번 영화제를 계기로 올해의 독립영화 경향과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한 작품을 꼽아보았다. /편집자

지옥 같던 축제,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 날 ‘서울독립영화제 2002’가 열렸다. 여기에는 42편의 크고 작은 영화들이 본선에 올랐다. 장편 극영화와 단편 다큐멘터리가 있는가 하면 실험영화와 애니메이션들도 그 사이를 비집고 치고 올라오고 있다. 성감에 관한 자의식을 은유적으로 거칠게 표현하는가 하면, 정치인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밥맛이야”라고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백화제방이고 안좋게 말하면 중구난방이다. 한국 독립영화계는 고상한 예술가 의식부터 싸구려 키치까지 모두 싸안고 있다. 좋게 말하면 다양함이고 안좋게 말하면 공통된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주목할 봉우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번 보자. 월드컵 시절 우리 모두는 애국자였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참여율은 겨우 70%를 넘기는 정도였다. 하지만 투표에 불참한 그들을 ‘삼등 국민’으로 탓할 수만은 없다. 월드컵이 배제한 국민들 즉 장애인,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애국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월드컵은 민족주의, 수구 보수세력, 서해교전, 미군 문제 등 숱한 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그들만의 월드컵>(최진성 연출, 다큐멘터리)은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이 작품은 논리적이고 정중한 태도로 또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깊이 있는 토론을 유도하는 그런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경쾌한 음악과 산만한 주제 변화, 감독의 개입과 감상적인 결말 등 얼핏 보기엔 가벼운 사회 기행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가벼운 형식 아래에는 굴종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단호한 내지르기가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다. 희망과 대안은 그런 태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독립 극영화와 실험영화 부문은 현란할 정도로 다양하다. 가출 소녀같은 세 소녀의 좌절과 열패감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스케치한 <바다를 간직하며>(원 연출), 가학적 피학적 성욕과 나르시시즘의 자기 분열 등을 그린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원숙현 연출), 다소 설익은 태도이긴 하지만 기존 영화 문법을 깨는 것이 바로 자본과 권력 구조를 깨는 것이라고 용감하게 주장하는 <시간의식>(김곡, 김선 연출), 매혹적인 인간 보고서인 <안다고 말하지 마라> 등도 있다. 이중 돋보이는 작품은 <비둘기>(강만진 연출)다. 강제로 앵벌이를 시키던 아버지는 공중 화장실에서 죽었다. 다정한 할머니 역시 하늘로 갔고 소녀는 한달동안 할머니의 시신과 살았다. 그 소녀는 포크레인의 둔중한 삽날이 벽을 부수는 동안에도 비상을 꿈꾼다. 소녀는 이를 악물고 비둘기를 잡아서 날개털을 뽑았다. 너무 정교하여 삭막하고 너무 삭막하여 가슴을 쥐어짠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주목해야 할 봉우리는 독립 애니메이션 부문인지 모른다. 사실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불과 십여년에 불과하다. 또 독립 애니메이터들의 작업 환경이나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들은 일본의 평균 수준을 능가하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도둑과 함께 도망간 신부를 찾는 신랑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렇고 그런 그림을 떠올릴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색채의 판타지, 운동과 음악의 판타지다. 애니메이션 <연분>(이애림 연출)은 그 기괴한 판타지를 경험케 한다. 또 쓰레기로만 만든 인형 애니메이션과 3D 애니메이션이 혼용된 <리사이클링>(박재모 연출) 등도 최근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의 놀라운 저력을 보여준다.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 애니메이션의 판타지를 경험함으로써 희망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독립영화는 영화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시대 속에서 요동하고 있다. 그 요동을 '쾌감있는 개혁'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이효인/영화평론가,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