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의 우리 영화가 왔다. 중딩들의 성을 다룬 <몽정기>와 대딩들의 성을 그린 <색즉시공>이 그것이다. 섹시코미디는 <아메리칸 파이>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등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이미 있던 장르이다. 그러나 <몽정기>와 <색즉시공>은 성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동과 교훈을 주는데, 이 점이 이들 영화의 빛나는 가치이다. 이 두 영화를 <대통령의 연인>이라는 귤이 회수를 건너와 함량미달의 아동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라는 탱자가 되어버린 예와 비교해보라! 두 영화의 성취는 우리 영화의 놀라운 쾌거이다.
10대의 성, 몽정기는 성장기다
<씨네21> 376호의 20자평은 <몽정기>를 “발정기”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는 “발정”이 아니라 “성장”이다. 청소년기에 눈뜨는 성적 자아는 사회적 자아의 단초가 된다.
소년은 꿈속에서 인어공주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몽정을 한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하루 밤에 딸딸이를 일곱번씩 치느라 꿈속에서조차 여자를 못 만나본 놈도 있고, 특정단어만 들으면 시도 때도 없이 꼴리는 통에 고생깨나 하는 놈도 있다. 그들에게 ‘여자’는 집합명사로, 욕망의 모호한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추상적 여자-일반’이 아닌 ‘구체적 여자-개인’은 만나본 적도 없다. 그들 ‘좆만한 것들’과는 달리 캔디와 빠구리까지 떠본 짱은 단연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빠구리를 선망하나 그 역시 여의치 않다. 소년은 동물적인 빠구리가 아닌 좀더 “인간적인 섹스”는 어떤 것일까 막연하게나마 궁금해한다.
그들 앞에 교생이 나타난다. 그녀는 글래머에, 감수성도 풍부하고, 타인에 대해 개방적이다. 그녀는 ‘여자-일반’의 대표단수로서 욕망의 모호한 투사체가 되기에 충분하다. 교실은 삽시간에 그들의 해소되지 못한 성욕으로 들끓는다. 그들은 그녀를 집단적으로 상상하고 욕망한다. 그들의 욕망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교생은 판타지의 담지체로 그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이를테면 공공재이다. 그러나 소년은 차츰 그녀를 개인으로 느끼고, 욕망하게 된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그는 교생이 욕망의 모호한 대상으로 공유되는 것과 필사적으로 싸워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도저히 맞설 수 없어 보였던 짱과 맞장을 떠 이기게 된다. 그의 용기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구체적 여자-교생을 구체적 감정으로 사랑하게 된 소년은, 단지 추상적 여자의 대표단수-캔디와 맹목적 행위, 빠구리만 떠본 짱보다 어느새 훨씬 성장하여, 내면적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교생에 대한 그의 우위는 그들 사이에서 인정받아 그는 “손만 뻗으면 그녀의 가슴을 만질 수도 있고, 그녀에게 나를 밀어넣을 수도 있는 두렵고”도 숨막히는 순간에 맞닥뜨린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는 아직 소년이고 주변인이다. 성인이 아닌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지켜주는 존재, 이를테면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로서의 자기를 확인한 셈이다. 그는 흔히들 ‘순수’라고 이름 붙이는 소년으로서의 자기 한계를 자각하고 체념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년은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그는 그녀의 편지를 통하여 그녀가 구체적 남자-담임을,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화를 걸어 “우리 교생 빠구리 내기 다시 하자!”고 외친다. 이 순간의 그는 교생을 사이에 둔 담임의 대립자로서, 주변인/타자가 아닌 주체가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난장이가 아니라 왕자와 맞서는 기사가 될 수 있음을, 아니 되어야 함을 자각한다. 아주 짧은 깨달음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본다. 그의 연적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빗속을 헤매고 있음을! 그는 담임을 대등한 입장에서 이해하고, 나아가 연민한다. 어쩌면 오이디푸스적 삼각구도라고도 볼 수 있는 이 관계에서 그는 억압되고 좌절하고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담임과 대등한 위치에서 그의/그녀의/그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담임에게 교생을 양보하기로 마음먹는다(‘Yield’는 패배이자 양보이다. 영미문화권에서는 패배와 구별되는 양보의 개념이 없는가 보다). 그는 자신의 대승적 선택을 적극적으로 완수하고자 젖 먹던 힘까지 내 달린다. 발목이 접질리는 위기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달려 살벌한 육상부 주장을 젖히고 기필코 승리한다. 그는 선언한다. “내 나이 15살, 몽정은 끝났다!” 그는 이제 더이상 모호한 성욕에 들끓는 소년이 아니다. 그는 구체적인 개인인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욕망을 이해하고 실현시켜주는, 책임있는 관계의 주체가 되었다. 성적 자아의 각성을 통해 인격적 성장을 이룬 그는 비로소 성인이 되었으며, 이후 몽정이 아닌 진정한 성과 사랑을 향유하게 된 것이다. 발정으로 시작하였으나 성장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몽정기>의 다른 이름은 <발정기>가 아니라 <성장기>이다.
20대의 성, 색즉시공 혹은 성속일여
색즉시공이란 거칠게 말하자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형식 논리적으로는 양립될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이 불교라는 변증법적 체계 안에서는 넘나들고 융합되는데, 이와 같은 논법의 또 다른 예가 ‘성속일여’(聖俗一如)이다. 숭고한 것과 범속한 것이 같다니, 흔히들 비속한 것으로 치부하는 포르노그라피가 성스러운 사랑으로 이어진다면 이를 ‘성속일여’라 할 것이다. <색즉시공>은 시종 성(性)을 소재로 한 포복절도의 코미디가 이어지다 마침내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는데, 종교의 본질이 성스러움 자체가 아니라 비속함을 포괄하는 성스러움 즉 성속일여라면, 이 영화는 자못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아니 이럴 수가!
그들은 혈기방자한 20대이다. 풍부한 성담론 속에서도 본격적인 성관계가 유예돼왔던 10대와는 달리 이제 드디어 실전이다. 그들은 전 세대의 20대가 고민하였던 “하느냐, 마느냐” 따위를 고민하지 않는다. “성이 대체 뭔가” 따위의 진부한 주제로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제도나 관습이, 그리고 환경이 그들의 성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자유로운 성을 구가하게 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성행위’가 ‘성의 해방’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성의 소외’가 되기도 한다. 자유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터득하고, 결정하며, 책임져야 하는 고독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성을 어떻게 향유하고 영위할 것인가” 하는 좀더 실질적이고 본원적인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임창정과 그의 동료들은 성관계를 열망하나 자위가 고작이다. 그는 28살의 늦깎이 대학생으로, 무엇이든 잘 먹고 잘 받아들이는 수용력(Capacity)이 큰 인물이나 일견 후줄근해 보인다. 더구나 하지원에게는 공교롭게도 치한으로 오인받고, 자위행위를 들키는 등 변태스러운 인상만 남기게 된다. 하지원과 그녀의 동료들은 내숭떨지 않고 성을 자신의 욕망으로 인정하며, 이제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그녀는 섹시하고 발랄하나 영악하질 못해서 남자를 쉽게 믿는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한’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 감정에 충실하게 사랑을 나누다가, 책임지지 않는 그의 사랑 법에 크게 상처받는다. 여기, 그녀의 곁에 임창정이 있다. 그는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몸 사리지 않고 돈을 벌어 물경 120만원짜리 반지를 생일 선물로 장만한다. 포용력이 넓은 그는 힘겨워하는 그녀에게 잘잘못을 묻지 않고 슬픔을 함께하며, 그녀를 살뜰히 보살핀다. 그녀를 여관방에 눕혀놓고, 브루스타를 가져와 이마로 마늘을 찧어 미역국을 끓여주고, 물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준다. 또한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그의 장기인 차력쇼를 보여준다. 그는 피흘리며 쓰러진 그녀를 찾아내 업고 뛰며, 부당하게 매를 맞는다. 실로 눈물나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보호자나 된 양 훈계하려들거나 애인이나 된 듯 버젓이 사랑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쉽게 판단하려 들지 않고 쉽게 차지하려 들지 않는 그는 무책임한 놈을 데려와 사죄시킨다. 그녀에게는 그의 보살핌이나 차력쇼보다 더 긴요한 것이 그놈의 사죄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그녀에게 사랑받는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그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는 숭고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지레 포기하지 않았으며 또한 성급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가 매혹되었던 즉물적 사랑이 아닌, 훨씬 성숙한 사랑을 보여주므로써 그녀를 감동시킨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 마음을 열고 “오빠” 하며, 존댓말을 한다.
이 영화가 낙태를 다루는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바이 준>에서처럼 죄의식을 극대화하거나 실제보다 무겁게 다루지 않는다. 영화는 관계 안에서 충분히 괴로운 그녀를 형이상학적 도덕(Moral)으로 단죄하기보다는, ‘신의’ 같은 인간들간의 합리적 윤리(Ethics)로 낙태와 성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욕망에 소외되지 말고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즐길 것, 그러나 신의를 저버리지 말 것!” 책임지는 성과 사랑, 이것이 이 영화가 이제 막 관계를 시작하려 좌충우돌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전하는 윤리이다.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섹시코미디를 표방하는 두 영화는 섹스와 코미디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하다. 섹스와 코미디의 공통점은 첫째, 쾌락을 지향하나 교감이 없으면 자칫 역겨움만 남긴다는 것이요, 둘째, 음악적 리듬감이 생명이라는 점이다. 두 영화는 코미디의 팽팽한 속도감을 놓지 않으며 쉴새없이 리드미컬하게 폭소를 터뜨려낸다. 정신없이 웃다보면 눈물이 핑 돈다. 그 와중에 파리가 한구석에서 계속 웃기거나, 마지막에 ‘싸이’가 뒤집어놓고 웃긴다. 울다가 웃으면 거시기에 털이 난다고라…. 그건 아마도 성인이 된다는 뜻일 게다. 울다가 웃게 되는 인생의 오묘한 진실을 터득하게 될 때 비로소 성인이 된다는 뜻일 터! 웃다가 울다가 웃으니, 성장과 성숙을 넘어 급기야 정화되어 성스러워진 느낌이다. 밤중에 암자에 찾아든 젊은 여자를 내치지 않고 받아들여, 그녀의 해산을 돕고 목욕시키며, 그 목욕물에 자신도 들어가 미륵존상이 되었다는 노힐부득의 고사가 문득 떠오른다. 성(性)을 통한 성(聖)이라…. 음…. 관세음보살….황진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