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호장룡>과 <환희의 집>(The House of Mirth)을 제치고 뉴욕비평가협회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마약소재 드라마 <트래픽>은 대중문화에 관한 실로 야심만만한 서사극이다. 1989년 영국 TV가 방영한 미니시리즈 <트래픽>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 영화는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만들기 위해, 무대를 옮겨 미국 국경 바로 남쪽에서 두명의 티후아나 경찰(베네치오 델 토로, 제이콥 버가스)이 마약수송기를 덮치는 장면으로 막을 연다. 그때 뜻밖에 다른 기관의 요원들이 나타나 이들을 따돌리고 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이것은 이어지는 수많은 반전의 신호탄이다.
이어 카메라를 북쪽으로 돌린 소더버그는, 두 형사에 대응하는 미 법무성 소속 마약단속국(DEA) 요원 한쌍(돈 치들, 루이스 구즈먼)이 샌디에이고에서 비밀소탕작전을 수행하다 일을 개판치고 마는 장면, 오하이오의 상류층 10대 4인조가 마약에 흠냐흠냐 빠져 있는 장면, 마이클 더글러스가 미국의 신임 마약수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워싱턴 D.C로 날아가는 장면을 잇따라 소개한다. <트래픽>은 그냥 기승전결에 충실한 정도가 아니라, 두 멕시코 마약 카르텔간의 복잡무쌍한 전쟁까지 모든 요소를 완비한, 마약문제 전체의 조감도라고 할 만하다. 소더버그가 연출뿐 아니라 촬영까지 도맡은 이 영화는, 각기 다른 색조로 표현되는 세 갈래 이야기가 평행으로 전개되는 것이 약간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양한 멜로드라마들이 서로 뒤엉키고 살을 섞기 시작하면서 다시 활력을 찾는다.<트래픽>은 마약문제가 남의 집 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관객의 심기를 건드리고 못살게 구는데, 그 결과는 마약수장의 금지옥엽 귀한 딸(에리카 크리스텐슨)이 마약중독자가 되는 대목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은 만큼 단조로운 클리셰들도 적지 않지만, TV 작가 출신인 각본가 스티븐 개건은 일부 뛰어난 장면들도 뽑아냈다. 친구 하나가 발작을 일으키자 10대들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려고 애쓰는 장면, 고뇌에 잠긴 더글러스의 아내(에이미 어빙)가 남편에게 네가 대통령하고 얼마나 알콩달콩한 사인지 하는 개소리는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딸하고 얼굴 맞댈 시간이나 좀 찾아보라고 내뱉는 장면 등이 그 예다(이 간결무쌍한 부부싸움 장면이 <아메리칸 뷰티>의 속보이는 연극적 장면들보다 훨씬 더 신랄하고 말고다).
알고보니, 더글러스는 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만큼이나, 멕시코 상황에 대해서도 눈뜬 장님이었다. 열여섯살짜리 사립고교생(토퍼 그레이스)으로부터, 게토에 가면 크랙이야말로 난공불락의 시장주도품목이라는 말을 들을 때의 그의 얼굴표정은, 이 영화에서 그가 펼친 연기 중 단연 압권이다. 모두가 수수께끼의 한 조각씩을 쥐고 있는데, 우아한 귀부인(캐서린 제타 존스)이 남편의 진짜 사업을 계승하는가 하면, 마약 중간판매상(미구엘 페러)이 자신을 체포한 DEA 요원들에게 북미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지네들 일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를 설교하기도 한다(따분해진 경찰들은 “지금 <래리 킹 쇼> 찍는 거야, 뭐야?”라고 반문한다). <트래픽>은 훈계조로 비칠 수도 있지만, 절대로 분수넘게 도덕적인 체하거나 문제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더글러스가 거창한 연설문을 집어던지고, 전 국민을 향해 “마약과의 전쟁은 우리 가족과의 전쟁입니다. 우리에게 과연 그럴 용기가 있을까요?”라고 묻는 장면에서조차. (설득력이 없긴 했지만) <원더 보이스>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약중독자로 나왔던 데 비해 여기서는 공직자로 출연하는 더글러스는, 이 영화의 명목상의 주연일 뿐이다. 실질적인 스타는 <바스키아>와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에 활력을 불어넣은 공로로 마땅히 받아야 했던 박수 갈채를 지금 와서야 수확하고 있는 베네치오 델 토로이다. 폼잡는 연기도 마다않는(<퓨너럴>에서 폴 무니를 패러디한 그의 연기를 능가하는 것은 <웨이 오브 더 건>에서 말론 브랜도를 흉내냈던 그의 연기뿐이다) 델 토로는, 불가사의한 멕시코 평민 역을 오만하지만 사려깊고, 바닥모르게 섬세한 야수로 묘사해낸다(어느 티후아나 술집에서 사이코 살인청부업자를 뒤쫓는 그의 연기는 예외지만). 환상적이리만치 폼잡는 델 토로가 그리 앞뒤 맞는 연기를 펼쳤다고는 볼 수 없다. 그의 스턴트가 멕시코 장군으로 출연한 토머스 밀란을 자극해 밀란 나름의 괴팍한 연기를 경지에 끌어올린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이클 만이 감독을 맡았더라면 훨씬 더 우울한 영화가 됐을 <트래픽>은, 할리우드판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모범사례다. 마약과의 전쟁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 영화는, 또한 교묘한 수법으로 영화산업을 두둔하고 있다.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데다가, 절반이 스페인어 대사로 제작된 영화라서만은 아니다. 할리우드를 씹어대기로 유명한 오린 해치 상원의원이 기꺼이 우정출연해서, 마이클 더글러스 반열의 스타들과 앞으로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워싱턴의 파티 장면을 보라. 스포트라이트에 곁다리 끼고 싶어하는 이 늙은 작부 같은 정치인의 욕심이 영화에서 조금이라도 더 튀고 싶어하는 배우의 그것을 닮았다면, 그의 비위를 맞춰주려는 소더버그의 안간힘은, 배우에게 휘둘리는 불쌍한 감독의 그것을 닮지 않았는가.(20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