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가 150편에 육박하는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었고,
그 영화들을 모두 합친 시간보다 더 긴 분량의 TV드라마 대본을 썼으며,
그와는 별도로 100권을 훌쩍 넘는 저서들을 남겼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게다가 그 100여권의 저서들 역시 단일한 장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집·대하소설·역사에세이·평론집·희곡·시나리오집·작법서 등 이른바 문학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장르를 포괄하고 있다면? 이 절륜의 필력을 자랑하는 불세출의 대작가가 초당 신봉승이다. 흔히 신봉승 하면 1983년부터 90년까지
장장 8년 동안 MBC를 통해 방연된 <조선왕조실?gt; 시리즈를 떠올리며 정통사극의 완성자이자 방송작가의 대명사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는 망망대해를 연상시키는 그의 가없는 그릇에 비하여 너무 옹색한 평가에 불과하다. 그 드넓은 바다를 이 좁은 지면에 비추어보자니 스스로 무모하다는
자탄에 빠져 자판에 손가락이 가지 않는다.
강릉 출생의 신봉승은 고향에서 강릉사범을 마친 이후 수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했다. 일찍이 문학에 뜻을 두어 중앙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1957년에는 청마 유치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경희대 국문과로 편입하여 학업을 마친 1961년에는 역시 같은 잡지에 조연현의 추천으로 평론가로도 데뷔한다. 같은
해 그는 국방부에서 주최한 시나리오 현상공모에 <두고온 산하>라는 작품으로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인 충무로 작가로서의 신고식도 마친다.
이 작품이 이강천 감독에 의하여 영화화될 즈음, 아예 직장을 중앙국립극장으로 옮긴 그는 서서히 라디오드라마나 TV드라마 대본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였는데, 신영균과 김승호가 주연을 맡았던 <월급봉투>는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자신의 첫 번째 라디오드라마를 각색한 영화다.
1960년대 후반은 시나리오 작가 신봉승의 시대였다. 고른 품질의 다작으로 유명한 그는 1968년 한해 동안에만 무려 18편의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 아닌가 한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산불> <독짓는
늙은이> 등이 당시의 대표작들로 꼽힌다.
신봉승의 시나리오에서 일관된 작품세계를 읽어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다. 그는 문예영화를 비롯하여 통속멜로·액션·코미디·추리물·사극·반공전쟁영화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지속해왔다. 김희갑과 황정순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자식들을 찾아다니는 <팔도강산>
시리즈의 대부분도 그가 썼고, <인간사표를 써라> <지프> <자크를 올려라> 같은 박노식표 액션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것도 그였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그의 작품세계에는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인다. 1972년에 TBC를 통해 방영된 일일연속극 <사모곡>을
쓰면서 역사드라마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임권택의 <연화>는 1973년에 TBC를 통해 방영된 같은 제목의 일일연속극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것인데, 브라운관의 인기는 극장가로도 이어져 속편까지 제작된다. 덕분에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양주 회암사가 관광지로 개발되고 건물의
복원까지 이루어지는 등 그 흥행의 여파가 대단하였다. 신봉승이 불교에 입문하여 법련거사라는 법명을 얻은 것도 이즈음이다.
1980년대 신봉승이 이룬 최고의 업적은 물론 <조선왕조실록>의
드라마화를 통하여 정사(正史)를 대중화시키는 큰 물꼬를 텄다는 것이다. 이따금씩 극중인물의 해석에서 사학계와 첨예하게 대립되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안방극장의 인기상품으로 만들어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이 대작가의 무게중심이 충무로에서 여의도로 옮아가게 되었음이 약간 서운할
뿐이다. 지난해에 발간된 (선 펴냄/ 2000년)는 수십년에 걸쳐 농축된 신봉승만의 창작이론서로
그 귀한 경험과 지혜를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고희를 바라보는 이 대작가는 요즈음도 자신의 홈페이지 www.shinb33.pe.kr를
통하여 젊은이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당당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2년 이강천의 <두고온 산하>
1963년 김수용의 <청춘교실>
1964년 김수용의 <월급봉투>
1965년 김수용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 ⓥ★
1967년 김수용의 <산불> ⓥ★
1968년 최인현의 <이상의 날개>
1969년 최하원의 <독짓는 늙은이> ⓥ★
1970년 신봉승의 <해변의 정사>
1971년 박노식의 <인간사표를 써라>
1972년 변장호의 <홍살문> ⓥ★
1973년 변장호의 <눈물의 웨딩드레스>
1974년 임권택의 <연화>
1975년 이원세의 <꽃과 뱀>
1976년 최인현의 <홍길동>
1978년 최인현의 <세종대왕> ★
1979년 변장호의 <을화> ⓥ
1990년 신상옥의 <마유미> ⓥ
1992년 이은수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