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물 <제7교실> <너무 너무 좋은 거야>를 찍었던 76년, 문공부로부터 <한국미술 2000년>이라는 홍보영화의 촬영감독을 위임받았어. 공보처와 농수산부에서 홍보영화 몇편을 의뢰받은 적은 있었지만, 무려 20년 전쯤의 일이었지. 그 일을 계기로 이듬해인 77년 문공부 홍보영화 <개미들의 행진>, 79년 상공부 홍보영화 <비극의 씨앗>, 80년 내무부 홍보영화 <국제 경쟁력을 기르는 길> 등을 차례로 제작한 바 있어. 당시엔 정부홍보용 문화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던 때라 내 작품을 찍는 틈틈이 공문 요청에 최대한 협조했지. 76년 <너는 달 나는 해>라는 작품을 찍을 때야. 바닷가를 배경으로 남녀주인공 투숏을 잡는데, 소품으로 쓰일 그림이 미처 준비가 안 됐다는 거야. 극중 여주인공이 화가였기에 그림 소품은 빠져서는 안 될 것이었지. 다행히 이젤과 캔버스는 있다기에, 5분 만에 바다를 묘사한 즉석 풍경화를 그려서 그날의 촬영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어. 미술이나 소품을 스스로 해결하는 경우는 비단 이 영화뿐만이 아니었지. 제작자들이 나를 반기는 이유 중 하나도, 주변 스탭들에게 의존하는 법없이 혼자서도 척척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 때문이었어. <악어>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를 찍은 미술가 출신의 김기덕 감독이 웬만한 미술작업은 혼자 해결하는 걸로 알고 있어. 손재주가 있다는 것은 때로 귀찮은 일은 그냥 봐넘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만큼 몸이 힘들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상황까지는 스스로 해결하는 거야.
8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영화계에는 진정한 재미, 진정한 웃음이 들어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었어. 홍콩영화가 인기를 끌면 그에 따른 모방영화를 제작해달라는 제작자의 주문이 이어졌지. 당시 제작된 영화를 보면 80년 <애권> <요사권>을 비롯해 82년 <관 속의 드라큐라> <생사결> <신 애권>, 83년 <여애권> <소애권> 등 주로 홍콩의 권법영화를 흉내낸 성인물이 많이 있어. 특히 <애권> 시리즈의 경우 모두 네편의 작품이 이어지는데, 사랑에 관한 권법이라는 뜻인 <애권>은, 당시 각종 무술영화에 단골처럼 얼굴을 내밀던 액션스타 배수천이 등장하지. 그는 74년 이두용 감독의 <(속) 돌아온 외다리>로 처음 선을 보인 뒤, <용호대련>(1974, 이두용 감독), <불타는 정무문>(1977, 남기남 감독), <불타는 소림사>(1978, 남기남 감독) 등에 출연하며 꾸준히 인기를 쌓아갔지. 그렇게 제작된 영화들은 홍콩이나 동남아 등지로 팔려나갔어. 비슷한 정서를 가진 나라들이어서 평판도 나쁘지 않았어. 그러나 문제는 원판까지 팔아버리는 바람에 현재 수중에 남아 있는 작품이 별로 없다는 거지. 보여주고 싶어도 어쩔 도리가 없어.
계속되는 저예산 흥행영화의 제작이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했던 나의 발목을 계속 붙잡아둘 수 없었어. 더이상 팔리는 영화만을 만들고 있을 수 없다고 느낀 나는 84년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작품 <젊은 시계탑>에 도전하게 되지. 정부시책에 맞는 영화, 이른바 우수영화에 도전한 거야. 전자제품 공장에 다니는 여공원과 중공업에 다니는 사내가 우연히 같은 셋방을 계약하게 되고, 승강이를 벌이다 결국 함께 살게 되지만, 생활의 어려움과 고향 부모의 반대로 힘들어하는 내용을 다룬 이 영화는, 내용적 완성도와는 별도로 다시 한번 창조적인 작업에의 즐거움을 안겨준 작품이었어. 그로부터 2년 뒤 <먼 여행 긴 터널>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나는 극영화를 만들지 않았지. 꼭 여기까지 하고 그만 두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신인 감독들의 출현과 다양한 장르를 요구하는 관객의 입맛을 맞추는 일은 진작부터 나를 시험에 빠지게 했어. 어떨 땐 제목을 잘 못 지어 마지막 작품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하며 혼자 웃곤 해. <먼 여행 긴 터널>이라는 제목처럼, 모두 84편의 극영화를 연출한 나의 긴 영화 여행이 갑자기 끝나고 어두운 긴 터널로 들어간 기분이었지. 그래도 25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카메라를 들었다는 사실이 나를 편안하고 뿌듯하게 만들어. 얼마 전 상명대 영화학과 교수자 영화평론가인 조희문씨가 계간지 <영상문화정보>에 실은 글에서 “이형표는 스스로 영화 만들기를 즐겼고, 즐겁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으며,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을 즐겁게 만들어준 ‘감성적 엔터테이너 감독’이다”라고 적어놓은 것을 읽는데, 기분이 좋더라고. 내가 내 자신과 사람들에게 주고자 한 건 강요하지 않은 웃음과 즐거움이었거든.
구술 이형표/ 1922년생구술 50년대 미국공보원(USIS)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군 홍보 및 기록영화 제작구술 미국 <NBC> <CBS>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뉴스 제작구술 60년대부터 극영화 86편 작업구술 <서울의 지붕밑> <말띠 여대생> <애하> <너의 이름은 여자> 등구술 80년대 중반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각종 전시관 기획, 설계, 시공 총괄구술 현재 등급위와 진흥위원회에서 활동 중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 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