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의 한국영화들이 남성공동체 사회의 분열 조짐에 대한 어떤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로드무비>는 매우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영화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로드무비> 이전의 한국영화들,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은 남성공동체의 우정과 의리 그 속에 존재하는 내부의 균열을 그려내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친구>에서 해체된 남성공동체의 윤리는 비장미 어린 희생과 무모한 용기의 형태로 보상받고, 이것이 불가능해진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라이방>의 주인공들은 소박한 도망을 모색한다. 그들은 여수로 베트남으로 ‘여기가 아닌 어떤 곳’으로 떠나는데 결국 이러한 도망은 그들에게 자신의 직업적 수행과 여자를 얻는 자그마한 성취를 남겨준다.
미래의 고전도, 걸작도 아닌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는 한국사회에서 현재 진행형 중인 남성공동체의 해체에 섹슈얼리티라는 새로운 관점을 보탠다. <공동경비구역JSA>가 조금만 더 오버했더라면 충분히 다루어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동성애 코드는 <로드무비>에 이르러서 길 영화라는 장르에 견인되어 의리와 우정의 이데올로기 대신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데올로기로 슬며시 자리바꿈한다. 영화의 첫 장면 추락하는 주가 장세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석원은 자신의 ‘멤버’들이 회사를 차리면, 즉 자신이 몸담은 남성공동체가 복원되면 자신은 대식과는 다른 처지에 놓이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실제로 <로드무비>에서는 그러한 일이 영화 후반부에 일어나지만, 그는 대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성공동체로의 복귀를 포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로드무비>는 ‘남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랑의 위대성’이라는 메시지를 전면화시키는데, 그렇다면 의리대신 사랑을 택한 <로드무비>는 친구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더 급진적인 영화일까 토니 레인즈가 주장한 대로 오해받은 걸작이며, 미래의 고전에다 위대한 동성애영화인가 결론적으로 보자면 나는 <로드무비>가 ‘오해받지도’, ‘미래의 고전도’, ‘걸작도’, ‘위대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동성애를 소재로 했을 뿐이지 본격적인 동성애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성애=불륜
<로드무비>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대식이지만 아마도 가장 현실적인 인물은 증권 펀드 매니저인 석원일 것이다. 토니 레인즈는 <로드무비> 옹호론에서 대식이 한국적인 마초이며, 그가 한국사회에서 남성적 역할과 이미지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토니 레인즈처럼 <로드무비>를 세번 본 뒤 내가 깨닫는 것은 영화에서 전형적인 한국의 남성적 역할을 습득하고 있는 이는 대식이 아니라 석원쪽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내가 담배를 피우자 여자가 무슨 담배냐며 화를 내고, 대식에게 거지 취급 말라며 자신에게는 많은 돌파구가 있다고 허장성세를 부린다. <로드무비>에서는 이렇듯 보수적인 이성애자 석원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동성애자인 대식과 정서적인 동일시를 일으키고 서로의 성적 성체성을 용납하게 되는 최후가 영화가 전해주려는 가장 극적인 핵심 포인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로드무비>의 내러티브를 분석해 보면, 석원은 단지 대식을 남자가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 그것을 정당화시켜주는 많은 장치들을 예비하고서야 가능하게 된다. 우선 석원은 아내에게서 버림받아야 하고, 세상에서 소외되어야 하며 그들의 사랑과 소통은 대식이 죽어갈 때 딱 한번으로 결정지어져 있다. 대체 이들이 보여주는 동성애는 왜 자신의 아내를 타자로 만들어 놓고 또 다른 여성 일주를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대상으로 확정짓는 남성 중심적인 장치를 반복하고 나서야 가능한 것일까 석원과 대식의 육체적 소통은 또한 왜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가서 한점의 죄의식도 없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일까
어찌보면 <로드무비>에서의 동성애는 한국영화에서 불륜을 취급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한 듯 보인다. 내 생애 단 하루 특별한 날, 그것도 상대방이 바람을 피워야 비로소 면죄부가 가능해지는 위반의 행동. 결국 대식은 석원과 애인 사이로 변화하는 지점에서 죽어버리고 마는데, 그렇게 됨으로써 <로드무비>는 동성애가 이 사회에서 얼마나 금기의 행동인지 얼마나 하면 안 되는 행동인지 얼마나 많은 면죄부를 받아야 가능한 위반인지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내 생애 단 하루 특별한 불륜이 일부일처제에 대해 질문하기보다 이미 일부일처제의 경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식은 이성애자투성이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포위 혹은 격리된 인물이다. 그는 사회적 손길이 없는 자연의 품으로 가야만 비로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벗어날 수 있다. 감독은 대식에게 도시장면에서는 닫힌 미장센으로 바다와 산에 이르러서는 열린 미장센을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면 대식은 포장마차신이나 감옥신에서 격자형의 프레임에 겹겹이 둘러싸여져 있으며, 낯선 남자와의 화장실 정사신에서도 그러한 폐쇄감은 비슷하게 드러난다. 전형적인 길 영화에서 그러하듯 인위적인 도시와 자연의 대비를 통해 대식의 인간성은 담보되며 그의 이동은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의 색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동성애자이기 앞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고민하고 아파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바라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석원이 자신을 떠났다고 절망하는 순간, 화장실에 가서 낯선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일까 이 장면은 대식이라는 캐릭터의 비일관성이 가장 두드러진 지점이다. 물론 좀더 호의적인 시각으로 대식의 행동의 동기를 추정할 수는 있다. 대식이 사랑의 아픔으로 자신을 자해하는 것이거나 석원에 대한 애증이 좀더 안전한 낯선 이에게 투사된 것이라는 등등…. 그러나 수돗물이 콸콸 쏟아지는 장면과 대식의 정사를 교차편집한 이 장면의 분위기는 대식의 성적인 긴장감이 대식의 내면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들의 동기 누락은 그것이 고의가 아니더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로드무비> 속의 동성애를 섹슈얼리티 관점보다는 섹스의 관점에서 사고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이 장면은 석원으로 하여금 대식이 동성애자임을 알아차리는 장치로 배려된 것이기도 하다. 대식의 동성애는 그와 동거하는 사람조차도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그의 성 행동을 목격해야 알아차릴 수 있는 생물학적인 것이다. <로드무비>가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전형성은 창녀는 창녀 같은 행동을 하고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이데올로기와 감정의 심한 균열
이러한 점에서 <씨네21>의 감독과의 대담에서 <로드무비> 안에 내부의 시선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대식과 석원을 둘러싼 시멘트 공장이나 수산시장 등의 남성적인 공간이 무성적이라는 서동진의 주장은 매우 정확하고 예리한 것으로 보여진다. <로드무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들여 찍은 투숏과 타이트한 클로즈 업을 통해 두 피사체를 내부가 아닌 외부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심정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잡아내려 든다. 더 나아가 이 영화의 많은 화면은 다양한 탈것들의 속도 감각으로 채워져 있다. 석원이 손목을 그었을 때 석원을 둘러싼 오토바이 폭주족들의 난폭한 속도 감각, 대식과 석원이 탄 기차나 이들이 얻어 탔던 각종 차들의 속도 감각, 차 배달을 나선 일주가 질주하던 오토바이의 속도 감각 등등. 카메라가 동일시하는 이들 현란한 이동수단들의 속도 감각은 스크린에 두드러진 생동감과 유목의 느낌을 선사한다. 그러나 아무런 이동수단도 갖지 못한 떠돌이 대식과 석원의 맨 발걸음은 대체 어떠한 느낌이었을까 대식과 석원의 맨 발걸음, 그것은 <로드무비>가 길 영화로서 가지는 핵심적인 장르적 공식임에도 불구하고, 바닷가 개펄에서는 석원이 대식을 들쳐업고 뛰는, 주인공의 맨발의 걸음걸이와 똑같은 느낌이 나는 핸드헬드 숏은 너무나 짧게 그친다.
그래서 <로드무비>가 표방하는 장르인 길 영화가 매우 자기 통찰적이고 내면 지향적인 장르인 데 비해 영화 <로드무비>는 외부 시선과 시각적 연출이 두드러지고 주인공 세부적인 동기가 상당히 누락되어 있는, 오히려 멜로 장르의 속성을 강하게 풍기는 영화로 비친다. <로드무비>는 이성애자를 불편하게 하기보다 이성애자를 감동시키려는 영화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드무비>가 동성애라는 소재를 한국영화 속에 끌어들인 파격성, 또한 스타일리시한 화면, 그리고 이 가운데 드러나는 감독의 진정성과 자신의 인물에 대한 애정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시중에 떠도는 평론의 상당 부분처럼 이 영화를 ‘동성애=이성애와 똑같은 사랑’ 혹은 ‘한국사회에서 좌절된 동성애’ 등의 코드에서 읽어낸다면 그것은 영화를 의미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로드무비>는 영화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와 영화가 전해주는 감정적인 속내가 따로 국밥인 매우 균열이 심한 영화다. 아마도 <로드무비>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균열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 남성들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의 균열과 정확히 일치하는 어떤 점을 잉태하고 있는 것 같다.
<친구>에서 <로드무비>까지 남성공동체의 와해를 다루는 대한민국의 영화들 속에는 이 무한경쟁의 자본주의하에서 그 위치가 어떠하든 우리간에 차별은 없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그 소망이 비켜갔을 때의 도망심리, 그렇게 함으로써 경계 자체를 누가 만들었는가 질문하고 전복하기보다 ‘너와 나는 같다, 아니다’라는 질문 속에서 끊임없이 빙빙 도는, 어떤 폐쇄회로의 순환을 거듭하려는 욕망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드무비>는 하나의 징후이다.
이것이 바로 토니 레인즈와는 영화평론가라는 공통점 외에는 아무런 백그라운드도 나눌 수 없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동양인이고 황인종이며, 간신히 이성애자가 된 어떤 여자평론가 (혹은 여성평론가)의 <로드무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기도 하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