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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 <아이 엠 샘>이 오싹한 이유
2002-10-31

왜 리타는 껴안아주지 않나

<아이 엠 샘>은 못났지만 사랑스러운 애인 같다. 7살짜리 지능을 가졌다는 샘(숀 펜)이 이끄는 대로 132분 동안 따라다니다보면, 샘의 등 뒤에서 팔을 내밀어 그를 안고 넥타이를 매듭지어주던 리타(미셸 파이퍼)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마음 깊은 곳을 만지는 따뜻함. 우린 그것을 얼마나 바랐던가.

이처럼 따뜻하고 저항하기 어려운 정서적 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잘 짜여진 영화적 힘으로부터 온다. 우선 소재가 특이하고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7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정신지체 아버지가 어머니의 도움없이 어린 딸을 키운다는 설정 자체가 공감과 연민을 끌어들일 여지가 많다. 이러한 플롯을 선명하고 풍부한 스토리라인으로 증폭시켜가면서 관객의 감정과 여유있게 승부를 벌이고 있다는 점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재능 혹은 할리우드의 노련미라고 해야 할까.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1- 입체적이고 윤기 흐르는 캐릭터

플롯 지향적인 영화가 대체로 캐릭터를 정형화하기 쉬운 데 반해서, 이 영화는 상당수의 인물들에 다면적인 입체감과 윤기를 불어넣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물론 샘이 있다. 무언가 심하게 부족해 보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택한 영화가 모두 그렇듯이, ‘정상’적인 관객은 샘이 가진 결핍을 은근한 경멸이나 연민 혹은 재미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점차 그의 내면적 가치에 동화되고 급기야는 정상인 자신의 비정상성을 성찰하게 된다. 그저 무관심하게 스쳐지나왔을 어떤 존재들을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정상과 비정상에 관한 편견 가득한 시선을 역전시키는 것,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아이 엠 샘>으로부터 감동받는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샘의 캐릭터는 첫 번째 장면부터 효과적으로 설명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습득된 규칙대로 익숙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 규칙 안에서라면 샘은 유능하고(!) 평화롭다. 스타벅스의 커피잔과 설탕을 느리지만 정성껏 제자리에 둔다든지, 누가 어떤 주문을 해도 항상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탁월한 선택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일을 8년 동안 싫증내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아마도 샘이 1등일 것이다. 감탄스러운 일은 또 발견된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비관하지 않고 놀랍게도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해 언제나 노력한다. 우리가 샘과 더불어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한다면, 오직 그가 계산대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덧셈과 뺄셈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줄 몇초간의 인내심 정도만이 필요할 뿐이다.

결정적으로 샘은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조건없는, 아니 조건을 알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조건없는 사랑은 인간의 영혼 혹은 신성의 본질이라고 한다. 지능이 낮은 모자란 샘이라고 제시 넬슨 감독은 비틀스의 목소리를 빌려 대답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야(All you need is love).

숀 펜은 샘이라는 시나리오상의 인물을 생생하게 형상화하는 데에 각별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정신지체 성인의 보디 랭귀지를 완벽하게(우리가 보기에는) 구사할 뿐만 아니라, 제한된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고결한 영혼의 느낌까지도 전달한다. 그는 <데드 맨 워킹> 이후 신뢰할 만한 배우로서, 9·11 테러를 성찰하는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서,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 계획에 대해 공개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양식있는 인사로서 세월이 갈수록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샘의 세계를 떠받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재미있다. 광장공포증을 가진 피아니스트 애니(다이앤 위스트)를 비롯해서 실제 장애를 가진 두 연기자를 포함한 다섯명의 친구들이 지원 그룹을 이룸으로써, 샘을 이색적이고 어쩌면 완벽한 양육자로 만들어준다. 슬픔을 이해하고 있는 총명한 아이 특유의 얼굴을 지어 보이는 루시(다코타 패닝), 잘난 상사에게 기가 눌려 있지만 속으로는 결코 존경할 수 없는 어린 비서 등 상당수의 캐릭터가 각각의 자리에서 어떤 뉘앙스를 발한다. 체면 때문에 샘을 돕게 되는 여성 변호사 리타 해리스는 샘의 세계를 가장 극적으로 대조되어 보이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를 통해 <아이 엠 샘>은 가정은 소중하다는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모든’ 가정은 소중하다는 진일보한 생각을 전달한다. 특히 리타가 법정에서 반대편 증인을 심문할 때 “당신은 자식을 키울 때 혼란스럽고 무기력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느냐”라고 던진 질문은 우리의 도도한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일격이다.

감독과 작가가 폭넓은 사례 조사를 통해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장애를 가진 부모들을 거듭 만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지성이란 의미에서의 능력은 부족하지만 성격이 개방적이고 자신들이 성취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자녀 양육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고결성을 지켜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2- 오! 비틀스

촬영과 편집 역시 멜로적인 호소력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극영화와는 사뭇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샘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려는 듯 여백과 단절이 많은 장면 설정과 촬영, 배우와 촬영감독 사이에 카메라 이외의 모든 기계장치를 배제하기, 콘티뉴이티 커팅(continuity cutting)이라는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편집방식을 파괴하고 캐릭터의 감정적 기복을 따라가는 구상적이며 실존적인 편집 등이 한데 모여 밀도 높은 에너지를 구축하고 있다.

<아이 엠 샘>은 또한 주인공 샘이 비틀스 강박이라는 설정을 빌려 영화 전편에 걸쳐 비틀스의 노래들을 멋지게 깔아놓는다. 하늘과 땅에 있는 다섯명의 비틀 역시 아마도 자신들의 음악이 소외된 인간의 실존과 사랑을 이토록 일관되게 옹호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에 대해 놀라워하지 않을까. 특히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 이어 두번이나 최고의 비틀로 칭송된 조지 해리슨의 기쁨은 더 클 것이다.

그외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부터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성공적인 대중영화에 대한 계속된 인용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레인맨>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제8요일> 등은 단순한 인용이나 추억의 차원을 넘어서 이 영화에 직접적인 영감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싹한 이유- 왜 여성의 무능에 대해서는 그렇게 잔인한가

<아이 엠 샘>에 대한 경탄은 여기까지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 그 훈훈한 이야기의 한켠으로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듯한 찬 기운도 아울러 흐르는 것을 느낀다.

우선 익숙한 이야기부터. 리타 해리라는 여성 변호사가 맡고 있는 진부한 역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리타는 미셸 파이퍼의 이미지에 기댄 전형적인 스타 캐스팅인데, 조지오 알마니 옷을 떨쳐 입은 일중독자로서 한번도 좌절해본 적이 없는 출세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아들의 사랑도 제대로 받을 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척하고 성질이 급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체면을 중시 여기며 권력 지향적이다. 그는 샘 앞에 눈물로 참회하고 아들과 함께 운동회에 나타남으로써 드디어 구원받는다.

지능이 부족한 샘이 스타벅스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딸을 키우려 노력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왜 육아의 어려움 속에서 일하는 여성의 ‘무능’에 대해서는 이토록 잔인할까. 교외에 사는 백인 중산층 가정에 대한 미국인들의 향수는 아직도 끈질기다. 여성이 하얀 레이스가 달린 에이프런을 두르고 남편과 아이를 시중드는 소시민 가정의 중요성을 옹호하기 위해, 일하는 여성을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 가정한 채 공격하는 것은 미국의 대중영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 안에서도 쉼없이 저질러지는 상투적인 편견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감행하는 무서운 이데올로기 공세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 엠 샘>이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샘과 그의 친구들, 마지막에는 유능한 리타 해리스 변호사까지 가세하여 공격하는 대상이 무엇인가 바로 사회보장제도다.

아동보호소나 법원이 정하는 양부모 제도 같은 것들은 정상적인 가족 구성이 불가능한 수많은 무너진 가정들을 사회적으로 보완하려는 오랜 노력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좌파의 입지가 극히 적은 미국사회에서 이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정책가들과 소수의 인권운동가들이 험난한 정치적 역정을 통해서 달성한 것이고, 이는 미국이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는 인권 국가로서의 지표다.

그런데 <아이 엠 샘>에서 샘의 가족을 고난에 빠뜨리는 어리석고 냉혹한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면, 이러한 제도에 대해 신념을 가진 백인 활동가이거나 경찰서와 아동양육시설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이다. 미국 내에서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가장 강력하게 요청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그룹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샘이 가족을 유지하는 것과 사회가 제도로서 지원하는 것은 왜 공존할 수 없는가. 문제가 있다면 제도의 융통성을 촉구해야지 왜 그런 신념 자체를 공격하는가. 영화는 심지어 그 활동가를 대머리라고 인신공격하고, 관객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 샘과 루시를 강제로 떼어놓는 실루엣 속에 그들을 배치함으로써 적대감마저 부추긴다.

미국은 지금 사회 전반에 걸쳐 진보와 보수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는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인 측면을 예로 들자면, 소수 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철폐를 적극적인 형태로 입법화한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에 대해 백인 중산층이 역차별이라며 불만을 표시하고 이같은 공세를 법률로 합리화하는 조치(California 209)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럴 때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가 가하는 문화적 교육은 다른 무엇보다 위력적인 정치 공세이자 이데올로기 공세가 된다. 이것이 바로 디즈니 비판자들이 줄기차게 지적하며 염려하는 지점이다(<아이 엠 샘>은 브에나비스타라는 디즈니 계열사가 배급하는 영화다).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흘러가고 보니 가슴 한구석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 우리의 샘과 루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자책 섞인 질문이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