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의 털털한 ‘경희’가 남겨준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이은주(22)씨는 차분하면서도 용감한 ‘수진’으로 돌아왔다. 지난 25일 개막한 광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인 공포영화 <하얀 방>(극장개봉 11월8일)에서다. 낙태수술 사이트에 접속한 여성들이 연속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에 휘말리는 방송국 피디를 맡았다. 독립영화계에서 꾸준한 실험영화 작업을 해온 임창재 감독의 데뷔작답게 시각·청각효과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메시지가 너무 좋아 두 말 않고 선택했어요. <번지점프를 하다> 이후 1년 동안 쉬다가 처음 택한 영화예요. 개봉은 <연애소설>보다 늦어졌지만.”
<오! 수정>과 <번지점프…>에 잇달아 출연하며 실제보다 나이들어 보이고 차가운 이미지로 굳어지진 않을까 염려했을 법하건만, 이씨는 똑부러지게 말했다. 물론 장르로선 그 동안 멜로가 가미된 영화만 해온 그에겐 파격적이다. 필름이 들지 않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씨가 꿈에 미리 본 영화 포스터가 이후 완성된 것과 똑같았다는 등 으스스한 뒷얘기도 많았던 현장이었다. 평소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보지 못한다”는 이씨지만 “남자나 여자나 모두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라 ‘용기를 냈다’고 했다. 공포영화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촬영 내내 <레퀴엠>이나 바흐의 곡들 같은 음악을 홀로 들었다. <연애소설>에 직접 연주한 곡을 삽입할 정도로 오랫동안 피아노를 쳐와 “뭐든 음악으로 생각하는 게 쉬운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소재와 주제든 ‘재미와 감동’이라는 명목으로 ‘용서되는’ 요즘 영화계에서, 아직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그는 좀 남달라 보였다. “데뷔작이 고3 때 찍은 박종원 감독의 <송어>였어요. 그 때 강원도에서 석달 동안 틀어박혀 라면 먹으며 강수연, 설경구 선배와 촬영했어요. 고생하면서도 정말 재미있었죠. 그때 아, 이게 영화구나. 이런 걸 배우는 거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전 이번 영화 하면 이걸 배우겠구나, 그런 기준으로 영화를 택해요. 허황된 블록버스터가 데뷔작이었다면 아마 갖지 못할 생각이겠죠.”
<연애소설> <하얀 방>의 잇단 개봉에 이어 그는 <하늘정원>에서 오랜 만에 영화로 복귀하는 안재욱씨와 호홉을 맞춘다. “코미디가 가미된 휴먼 멜로예요. 냉정한 호스피스 병동 의사와 사랑을 느끼게 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역을 맡았는데 우연히 본 시나리오를 단숨에 읽어버렸어요.”
광주에서도 “뭐가 맛있어요” 묻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번데기를 즐겨 사먹는 그는 “원래 지나치게 소탈한 성격”이지만 적어도 영화 선택의 기준은 확고했다. 데뷔 4년 만에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배우들 가운데 한 명이 된 이유가 있음직했다.
광주/글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