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브라스 반주가 흘러나오며)… 서울의 지붕 위에 아침해가 솟으면, 오늘도 새로운 시대와 낡은 시대가 어깨를 겨루고 사는 이 골목 안에, 서울의 희한한 꿈과 사랑과 웃음과 눈물이 살아서 숨결 짓는다.”<서울의 지붕밑>(1961) 오프닝 내레이션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 신필림에서 활약하던 나에게 드디어 메가폰을 쥘 기회가 온 거야. 1961년 <서울의 지붕밑>이 내 극영화 데뷔작이었어. 신성일, 엄앵란, 김희갑,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이 영화는 서울의 한 한약방을 중심으로 노인 세 사람이 한 동네에 살면서 벌이는 인생사의 애환을 그린 희극이었지. 서울의 다양한 풍경을, 화가가 되고자 했던 나의 미적 감각을 살려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으로 각각의 숏에 채웠어. 당시 독일의 빌리 와일더니 하는 유명 감독들이 만드는, 가슴에 와닿는 현실적인 작품을 보고 나 역시 우리의 뚝배기 현실을 필름에 투영해보자는 생각이 발단이 된 거지. 영화가 개봉된 뒤 신문평도 괜찮았고, 관객의 반응도 호의적이었어. 아무래도 그전에 나온 영화들과 차별되는 서민성이 관객의 강한 동조를 이끌어낸 것이라고 생각해. 한해 전에 등장한 <로맨스 빠빠>(신상옥 감독, 신성일·최은희 주연, 1960)는 감원 대상에 든 가장과 혼사를 앞둔 딸을 중심으로 가정의 소박한 행복을 묻는 서민영화, 혹은 사회영화의 효시라고 할 수 있어. 영화계에 이는 새로운 물결과 더불어 방송사에서도 멜로드라마 일변도의 연속극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룬 사회극들이 등장하기 시작해. 이는 당시 4·19라는 사회적 이슈와 무관하지 않았는데, 4·19 이후 일기 시작한 사회정의와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와 4·19 이후의 갑자기 달라진 젊은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심지어 이때까지 볼 수 없었던 농촌을 무대로 한 연속극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지. 영화가 개봉된 뒤, 신 감독이 내게 해준 말이 기억나는군. “이게 이 감독 자네에게 평생 대표작으로 따라다닐 걸세. 감독에겐 모름지기 첫 작품이 대표작이 될 수밖에 없어. 첫 작품보다 더 나은 영화를 찍기란 어려우니까 말야.”
나의 두 번째 극영화는 역시 천연색으로 촬영한 <대 심청전>(1962)이야. 제법 스케일이 큰 작품이었는데, <심청전>에서 용궁의 춤이 등장하는 수중장면을 찍기 위해 일본까지 다녀왔어. 기술적인 욕심 때문이었지. 특히 심청이 연꽃에서 나오는 장면에선 미러 워크(mirror work)라는 특수효과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흔하지만 그 당시 처음 사용되는 기법이었어. 투명한 유리판의 일부를 거울로 만들어, 배경을 그대로 통과시키면서, 합성하고자 하는 대상을 거울로 비춰내는 기법이라면 설명이 될까. 거울에 비출 대상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45도 정도에서 거울로 반사시키는 거야. 예를 들면 병풍을 배경으로 누워 있는 용왕 앞에 갑자기 심청이 나타나는 장면은, 용왕과 병풍을 투과시키는 유리를 가운데 놓고, 심청의 모습만 거울로 반사시켜 갑자기 등장하는 효과를 얻는 거지.
또 다른 히트작으로는 64년의 <말띠 여대생>을 빼놓을 수 없지. 발랄한 신세대 말띠 여대생과 구세대인 말띠 사감 선생간의 갈등을 그린 이 영화는 세간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모았어. 더구나 이화여대를 배경으로 촬영한 사실로 인해 진짜 여대생의 현실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대생의 이미지를 두고 영화의 리얼리즘을 따지는 공방이 지면에 치열했지. 이 영화는 63년에 쓰여진 시나리오 작가 신봉승의 작품이었어. 64년 1월1일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약 11만명이 영화를 보고 갔지. 그해 서울 시내의 말띠 여대생이 5200, 5300명 있다는 조사를 바탕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지면, 그들을 비롯해서 일가 친척들도 보러 올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어. 예상은 꽤 정확히 맞아떨어졌지. 비행기를 조종하고, 말을 타고, 자동차를 모는 왈가닥 여학생들이지만, 사회질서나 도덕규범에는 엄격한 건전하고 위트있는 여대생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어. 여배우 엄앵란의 톡톡 튀는 매력이 지금 봐도 웃음짓게 하는 재밌는 영화라고 자부해.
구술 이형표/ 1922년생구술 50년대 미국공보원(USIS)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군 홍보 및 기록영화 제작구술 미국 <NBC> <CBS>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뉴스 제작구술 60년대부터 극영화 86편 작업구술 <서울의 지붕밑> <말띠 여대생> <애하> <너의 이름은 여자> 등구술 80년대 중반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각종 전시관 기획, 설계, 시공 총괄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 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