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의 일이다. 추석 시즌에 개봉한 우리 회사의 <접속>이 이른바 말하는 ‘흥행 대박’을 터뜨리며 룰루랄라 순항 중일 때, 뒤통수가 어지러운 사고()가 터졌다. 모 주간지에서 <접속>이 일본영화 모리타 요시미쓰 감독의 <하루>를 표절했다는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모 평론가가 글을 실었는데, <하루>와 <접속>의 소재 등을 들어 표절 혐의를 비교적 강하게 피력했던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 문화의 가열찬 활성화가 안 돼 있던 시기여서 그 파장이 마른 들판에 불 번지듯 퍼져나가진 않았으나, 제작사는 2년 동안 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시나리오 작업 기간의 고통과 고생이 떠올리며 ‘과격하게’ 흥분했다.
우리 회사도 시나리오 작업 마무리 중에, <하루>라는 영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모 영화 월간지에 실린 일본영화 신작 소식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고 일본에 있는 지인과 연락이 되어 비디오테이프도 구해볼 수 있었다. 당시엔, 희희낙락하며 ‘참 신인 감독이 모리타 요시미쓰 같은 거장 감독과 비슷한 발상을 했다니’ 하며 감독을 치켜세우는 농담을 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흥분한 제작사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법적 대응을 불사하겠다며, <하루>의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해 기자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 사건은 법정으로까진 가지 않았고, 쌍방간의 사과() 및 수용으로 끝을 맺었다.
요즘, ‘빙의’란 소재로 만들어진 일본영화 <비밀>과 한국영화 <중독>간의 묘한 감정적 난기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각종 매체에서 소재를 근거로 두 영화가 비교되고 화제로 삼기도 했다.
곧 개봉할 <중독>의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엔 두 영화와, 특히 ‘빙의’란 소재로 설전을 벌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객관적인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밀>이 시기적절하고 재빠르게 <중독> 개봉에 앞서 개봉을 주도, ‘이슈 메이킹’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민함이 서로간의 영화흥행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더 두고볼 일이다. 그러나, 후발 개봉영화의 당사자들은 속이 탈 노릇일 것임이 분명하다.
얼마 전엔, 보다 일주일 먼저 미국영화이자 야구 소재를 다룬 <루키>가 개봉되기도 했다. 우연히 극장에서 본 <루키>의 예고편 자막을 보니 원래의 개봉 일정보다 훨씬 뒤로 돼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보다 선개봉한다는 전략을 세웠을 거라는 ‘추측’을 해보았다.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두편 모두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피아니스트>가, 재미있게도 같은 제목으로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소재가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동시에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땐 경험도 짧고, 인품도 모자라 ‘과격’하게 흥분했었던 나로서는, <접속>이 요즘 만들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지금 같은 시절이라면, 누군가 잽싸게 <하루>를 <접속>보다 먼저 개봉하는 기지를 발휘할지도 모르는 일. 인간적 ‘상도의’보다는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움직이는 요즘 영화계의 변화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는 중이다.
<씨네21>에도 매번 ‘한국영화 제작진행표’가 게재되고 있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선, 몇년 전의 홍콩처럼 쉬쉬해가며, 며느리도 몰래 영화를 찍어서 깜짝 놀래키듯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점점 생각과 행동이 굼뜬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도래하는 것 같아, 적잖이 초조해진다.심재명/ 명필름 대표 shim@myungfil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