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영화계의 신예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은 파스빈더가 남긴 유작의 해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영화화한 것이다. 파스빈더는 1999년 베를린 영화제 최고의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이 영화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귀환한 듯 보인다. 파스빈더의 삶과 매우 흡사하게,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은 한편의 비극적 광대극이자, 일말의 감정적 동요도 없는 기괴한 러브스토리다.
오만하고 위압적인 레오폴드(베르나르 지로도)는 자기 나이의 반도 채 안 되는 프란츠(말릭 지디)를 유혹해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자신들이 겪어온 여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말판 놀이를 즐기다가 불쑥 “너 남자랑 자본 일 있니”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프란츠는 그 질문에 못지않은 놀라운 반응을 보인다.속으로는 늘 꿈꿔 왔지만 실현될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이 관계가 시작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은 파스빈더적 주제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페트라 칸트의 쓰디 쓴 눈물>이나 <사계절의 상인>과 같은 그의 중기 작품 속의 미장센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조명은 평면적이고 구도는 정면이며, 배우는 곧잘 거울 앞에 배치된다. 뮤직박스의 반복된 울림이 구두점을 찍고, 연극성을 강화하기 위해 단 한 장면의 야외신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영화는 파스빈더에 대한 헌정이자 도용이다.
실제로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의 공간은 레오폴드의 아파트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 장면으로부터 여섯달 뒤, 프란츠는 퇴근하는 레오폴드를 총총걸음으로 맞이하지만, 이 불평 많고 위압적인 보험 영업인은 보기에도 순종적인 프란츠를 호통친다. 그리고 프란츠는 스테레오를 박살냄으로써 보복한다. 이처럼 결코 평온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은 두 사람의 여자친구들이 동시에 등장하면서 한층 더 복잡해진다. 일나간 레오폴드를 본딴 듯, 프란츠는 자신에게 실연당한 안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해대면서 “과연 행복이 뭘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만약 프란츠가 젊은 시절 파스빈더의 어떤 측면들을 보여 준다면, (십대 시절 파스빈더는 종종 남창 노릇을 하곤 했다) 레오폴드는 매혹적인 감독이자 탁월한 조종자인 성숙한 파스빈더를 대변한다. 돌출적 유머와 계속되는 대화, 영화의 흐름을 끊는 지리한 댄스로 이어지는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은 인간 존재의 묘사라기보다는 인간들간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도해이고, 성이라는 소재보다는 그것에 부여된 권력관계에 관한 영화이다.
오종의 또다른 영화 <크리미널 러버>는 매끄럽게 계산된, 그리고 음흉한 작품이다. 슈퍼 8mm로 작업을 개시한 이 젊은 영화감독은 뒤틀린 도발에 대한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걸맞게 영화 <크리미널 러버>는 십대 소녀 앨리스가 자신을 맹목적으로 흠모하는 동급생 뤽을 위해 스트립댄스를 추고 있는 듯한 오싹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뤽이 앨리스의 관심을 끈 동급생을 처참하게 죽이는 초반부에선 이 영화는 마치 프랑스판 <내츄럴 본 킬러>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인물의 성병리학적 양태가 서서히 드러날수록 이들의 행위는 점점 앞뒤가 맞아 떨어지기는 하는데 더욱 기괴하게 보인다.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없는 이 두 주인공은 희생자의 시신을 묻으러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게 되고, 곧 과자로 지은 ‘마녀의 집’을 만난다.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에서 파스빈더의 외투를 빌려 입었던 오종은 여기서 현대의 타블로이드판 헨젤과 그레텔을 창조하기 위해서 파스빈더 못지않은 교묘한 술수를 쓰고 있다.
<크리미널 러버>는 오종의 다른 영화들만큼 교활하지만, 훨씬 호소력 있고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두 주인공의 억류기는 동화적인데, 영화의 중반쯤 회상장면을 통해 다시 보여주는 최초의 살인행위는 바로 그 동화성과 충돌해서 더욱 역겹게 느껴진다. 이러한 시각적 도발은 랭보에 대한 앨리스의 열정이나, 뤽이 등장하는 <사이코> 패러디 장면에서처럼 중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히치콕적인 부분이 관객의 연민을 구성하고 이용하는 데 있다면, 가장 오종다운 점은 밀실 공포적 악몽에서 순수한 꿈의 상태로 움직여 가는 영화의 흐름에 있다 할 것이다. 짐 호버먼/ 영화평론가, <빌리지보이스>
번역 권재현
* (<빌리지 보이스> 2000.7.18(<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 7.25.(<크리미널 러버>).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