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고우영(63)씨는 지난 달 대장을 40㎝나 잘라냈다.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요즘도 “패잔병을 소탕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 줄어든 식욕과 어지럼증에 힘든 나날을 보내지만 모처럼 그의 얼굴이 활짝 폈다. 오려지고, 지워지고, 뜯겨진 채 발간됐던 만화 <삼국지>(전 10권, 애니북스 펴냄)가 24년 만에 제모습을 되찾아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군용 트럭 비슷한 것에 깔려서 온몸이 갈갈이 찢어졌던 자식이 다 큰 청년이 돼서야 온갖 수술 다 받고 사람 모양을 갖추게 된 거죠.” 그는 1970년대의 폭력적인 심의잣대를 군용 트럭에 비유했다. 78년 한 일간지에 연재됐던 <삼국지>는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1백여 쪽이 삭제·수정됐다. 선정적이라고 지우고 잔인하다고 오려내고 어떤 부분은 정치적으로 불건전하다고 통째로 들어냈다. “우스개 만화라고 해도 획 하나, 문장 한 구절에 내 인생철학이 담긴 건데, 걸레가 된 작품이 한심해서 언젠가 다 불태워버리려고 한 적도 있어요. 그걸 보는 독자들한테도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했고.” 며느리의 극구만류로 원본을 보관한 덕에 그는 지난해 <삼국지>를 창작 당시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복원된 작품은 <딴지일보>에 연재돼 네티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딴지일보>에서 처음 연재를 제안했을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 30년 전 이야기를 요새 보면 얼마나 썰렁하겠어. 그런데 무삭제판으로 복원해보자는 이야기에 ‘뿅’ 가서 시작한 거예요” 연재를 끝낸 뒤 무삭제판 <삼국지> 전권이 씨디롬으로 먼저 나왔다. 이번에 책으로 나온 <삼국지>는 씨디롬의 그림과 글자들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또한 각 권에는 만화 내용과 관련된 사료들을 모아 ‘삼국지 연표’‘적벽대전 양군의 전략분석’‘삼국의 참모들’ 등 삼국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덧붙였다. 별책부록으로 작가가 새로 그린 <삼국지 등장인물>은 방대한 등장인물의 성격과 역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용의 이해를 돕는다.“복원을 하다보니 그때 내 실력이 부족해서 또 마감에 쫓기느라 엉성하게 슬쩍 넘어간 부분이 많더라구요. 세련되게 고치고 싶은 욕심도 생겼지만 그대로 뒀어요. 그렇게 하면 옛날에 내가 치를 떨던 삭제나 수정과 다를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시디롬 발행이 설악산 등정이라면 이번의 책 출간은 안나푸르나 정복처럼 느껴진다는 고우영씨. 그는 출판사와 손잡고 조만간 장편 데뷔작인 <일지매>와 <초한지>의 복원작업도 시작할 계획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