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머피의 법칙처럼 어릴 때 재미있게 보았던 애니메이션은 항상 밥 먹을 시간이나 이른 아침, 아니면 제사와 같은 큰일이 있을 때 방영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또 하나의 법칙을 더하자면, 그런 애니메이션 시리즈나 단편은 재방송을 안 하거나 아니면 또다시 보기 힘든 시간대에 방영되는 것이 보통이다. TV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이 정식비디오로 전편이 출시되는 경우가 채 10∼20%가 안 되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보니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나서 어린 시절 약 10년간 보아왔던 애니메이션 중 마음에 드는 것을 다시 찾아보는 데 다시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추억 속의 애니메이션을 모아가는 후반 10년 동안의 즐거움 중 하나는 자신이 보아왔던 작품 속에서 여러 번씩 중첩되어지는 이름을 접하면서 내가 좋아했던 작품들의 성장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예로 들자면 어린 시절 푹 빠져 보던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추억의 기반 위에 고등학교 시절 해적판 비디오로 우연하게 보게 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을 보면서 이 감독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극장판만 모으기 시작했지만, 이후 작품 일부나 레이아웃을 담당했던 <명탐정 홈즈>나 <하이디> <엄마찾아 삼만리> 등을 찾게 되고 그가 1960년대 몸담으며 초창기 시절을 보낸 ‘도에이 동화’ 시절의 작품인 <걸리버 우주여행기> <태양의 왕자 홀스의 모험> <장화신은 고양이> 등을 구하게 되고, 급기야 그의 작품세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한 <백사전>이나 <왕과 새> <이야기 속의 이야기>와 같은 작품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이렇게 거슬러올라가 본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아무리 대표적인 집단작업 중 하나인 애니메이션에서도 면면히 흐르는 작가의식과 그 사람의 작품의 성장과정을 공감하게 된다.
1998년 애니메이션 장르로는 상당히 생소한 서스펜스 스릴러물 <퍼펙트 블루>로 화제를 모은 곤 사토시 감독과 각본가 무라이 사다유키 콤비가 다시 뭉쳐 만든 <천년여우>(千年女優)가 지난 9월14일 일본에서 개봉하였다. 각종 영화제의 수상소식이나 드림웍스에서 미국 배급을 맡았다는 겉포장만이 아니더라도 세밀한 화풍 속에 현실과 환상이 중첩되어져가는 스토리를 짜임새 있게 풀어가는 두 콤비의 실력과 일본 내에서도 최상위 레벨의 작화실력을 자랑하는 ‘매드하우스’가 만든 작품이라는 면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인기여배우 후지와라 치요코가 연기해내는 수많은 배역들이 펼치는 여러 세계는 마치 수십편의 작품을 보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미우치 스즈에의 <유리가면>이 연상된다).
과거 재미있게 본 작품 중에 <노인 Z>와 <달려라 메로스>라는 작품이 있었다. 그리 유명한 작품은 아니었고 스토리도 그럭저럭이었지만 영상의 퀼리티나 음악 부분은 마음에 들었는데, 곤 사토시의 프로필을 뒤적이다보니 이 두 작품에서 ‘미술설정’과 ‘레이아웃’을 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도 기쁠 수가 없었다. 좋아했던 몇몇 애니메이터들은 작품활동을 접거나 그저그런 매너리즘에 빠져가는 모습을 보며 실망할지라도 또 하나의 작가가 하나하나 자기 작품의 라이브러리를 넓혀가고 있는 것을 느끼면 아직은 본 애니메이션보다는 볼 애니메이션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천년여우>의 주인공처럼 수많은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 애니메이션 속에서 많은 꿈들을 경험하는 것은 배우 되기보다는 훨씬 손쉬운 일일 것이다.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