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때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기정사실로 굳어져가던 1905년, 암행어사가 꿈이었던 서당 훈장(신구)의 둘째아들 호창(송강호)은 과거가 폐지되자 하릴없는 청춘을 보내다 야구를 하는 미국 선교사들을 보게 된다. 선교사와 함께 일하는 민정림(김혜수)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 호창은 조선 최초의 야구팀 YMCA야구단의 4번타자가 되고 YMCA야구단은 승승장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군대가 야구 운동장을 점령하고 YMCA야구단은 일본 군대의 야구팀인 성남구락부와 시합을 갖게 된다. 8:0의 참패, 업친 데 덥친 격으로 민정림과 투수 오대현(김주혁)이 항일운동과 관련된 죄목으로 수배당하면서 YMCA야구단은 해체 위기를 맞이한다.
■ Review
‘그들은 이길 수 있는가?’ 모든 스포츠영화가 던지는 공통된 질문은 이것이다. 제 아무리 소림사 무술의 달인인 주성치(<소림축구>)라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알리(<알리>)라도, 아버지의 크리켓 재능을 물려받은 제스(<슈팅 라이크 베컴>)라도, 승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들 앞에 놓인 장벽은 높고 몰아치는 눈보라는 매서우며 밀려드는 파도는 사납다. 조선 최초의 야구팀 YMCA야구단이 헤쳐갈 길도 그렇다. 나라는 기울어가고 세상은 종잡을 수 없게 뒤엉켰으며 선비는 지조를 잃었으니 시름에 젖은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과거제도의 폐지로 암행어사의 꿈을 접은 젊은 선비 호창 앞에 떼구르르 공 하나가 굴러온 것은 그때부터 의미심장해진다.
<YMCA야구단>은 호창이 자기도 모르는 새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데서 시작한다. “운동 좋아하십니까?”라는 신여성 민정림의 질문에 괜한 헛기침을 하며 “나, 선비올시다”고 답하던 호창은 “지금 베이스볼을 하게 되면 조선 최초가 됩니다”라는 민정림의 한마디에 마음이 움직인다. 옛것이 남아 있지 않다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리라. 호창의 타고난 타격감각은 암행어사의 꿈이 가로막힌 것에 값하는 보상이다. 물론 여기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쉘 위 댄스>의 야쿠쇼 고지가 그랬듯 호창은 혼란에 빠진다. 그가 사랑하게 된 것은 야구인가? 여자인가? 혹은 야구와 신여성으로 대변되는 신문물인가? 정치적 의미부여를 피할 수 없는 개화기 시대상이 배경이지만 <YMCA야구단>이 천상 스포츠영화인 것은 이런 대목에서 드러난다.
혼돈은 야구를 통해서만 극복되고 정리된다. 그것은 호창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좀더 뚜렷하게 표현된다. 명륜동 선비골에 학이 사리진 것을 탄식하는 아버지, “너만큼은 날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는 아버지, 호창은 아버지의 바람이 낡은 것이라는 걸 알지만 거역하기 어렵다. “제가 보기에 요새 황성에 학이 뜸한 것은, 금세기에는 학처럼 살아서는 힘들다는 일종의 자연의 계시가 아닌가” 하며 너스레를 떨다 노한 아버지가 던진 바둑알 통에 머리를 맞는 장면은 폭소를 불러일으키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꿈은 국운이 다하면서 이미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어느날 한마리 학이 집마당을 찾지만, 그건 의병이 됐던 형이 이승을 떠나며 하직인사차 들른 것인지 모른다. 서당 훈장을 이어받는다 해도 아들의 미래가 밝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 큰아들의 죽음으로 유추할 수 있다. 아버지는 고집을 접어야 하고 호창은 다시 야구방망이를 들어야 한다. 아버지는 낙향한 아들에게 야구기사가 실린 <황성신문>을 던져주며 말한다. “거기 좋은 글 많이 실렸더라.” 스포츠의 감동이 그렇듯 <YMCA야구단>도 장벽을 허물고 한계를 극복하는 순간,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9회말 역전 드라마를 펼치는 익숙한 패턴을 전개하지만 <YMCA야구단>은 정정당당한 스포츠정신이 실종된 수많은 조폭 소재 코미디와 달리 정석대로 플레이하는 영화다. 웃음은 차곡차곡 쌓인 드라마에 상승의 리듬을 부여하는 데 충실하고 종횡으로 짠 플롯은 허튼 낭비가 별로 없다. 1905년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양반과 머슴이 서로를 위하고 친일파의 아들과 항일운동가가 우정을 나눌 수 있게끔 고안한 마지막 시합의 정경은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숙지한 연출자의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마패나 학처럼 단순한 상징을 다용도로 쓰는 재능은 판타지의 입구와 출구를 단단히 봉인한다.
실제로는 불가능했을 <YMCA야구단>의 승리가 마패 하나로 홈런을 치는 감독의 지략으로 가능해진 셈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기가 그렇듯 따라주는 선수가 없으면 감독은 유명무실하다. 선수로서 MVP는 단연 송강호다. <반칙왕>의 임대호나 <공동경비구역 JSA>의 오경필 중사가 그랬듯 송강호는 대사의 타이밍이 예술의 경지에 오른 배우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고 반응하지만 그 모습을 보노라면 배를 부여잡게 된다. <YMCA야구단>에서 두보의 시를 적은 호창의 연애편지가 을사조약 체결 뒤 자결한 민정림 아버지의 유언처럼 낭독되는 순간 난처하면서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나 학이 사라진 걸 개탄하는 아버지에게 오리를 가리키며 저게 학이 아니냐고 우기는 장면은 정녕 4번타자다운 파괴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사랑하기 좋은 날>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등 야구가 소재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다 이 영화로 데뷔한 김현석 감독은 우연히 접한 <한국야구사>라는 책에서 <YMCA야구단>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 땅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1905년, 최초이자 최강이었던 황성YMCA야구단, 열혈야구팬인 김현석 감독에겐 그 시절 이야기가 <시네마천국>에서 소년 토토가 지녔던 영화에 대한 기억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아름답고 가슴시린 이야기 한 토막을 만들어내고 싶게 마련이다. <YMCA야구단>이 100년 전 기록영화필름에서 시작해서 YMCA야구단의 오래된 흑백사진으로 끝나는 것은, <시네마천국>을 연상시키는 음악과 포근한 황금빛 영상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련한 옛사랑이 거기 있었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 척박한 시절에도 작은 희망이, 승리의 환희가 있었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정과 진심이 YMCA야구단을 응원하게 만든다.남동철 namdong@hani.co.kr